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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1세기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한다 ⑦ 가수·해밀학교 이사장 인순이

더연 / 기획인터뷰 / 2015.12.17

 

21세기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한다

- ⑦ 가수·해밀학교 이사장 인순이



“어떠한 문화도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사회도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말했다.  문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표현할 언어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자아의식도 없었을 것이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도 상당히 제한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문화 없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 문화가 부재한 삶은 낯설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문화의 부침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내면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왔음을 기억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일찍이 문화강국론을 설파했다.  ‘한류’를 대표 상품으로 내놓는 우리 문화계의 현 주소가 ‘문화강국'과 얼마만큼 일치되는지는 좀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될 것이다.  다만, 장밋빛으로 그려졌던 21세기의 첫 장이 생각보다 녹록하지 못했음을 되새기며, 이와 함께 쪼그라든 우리 내면의 상태를 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연은 ‘문화예술’로 일컬어지는 분야 - 협의로서의 문화 - 에 종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와 문화가 처한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① <변호인> 제작자 최재원
② 표종록 JYP 부사장
③ 연극 연출가 고선웅
④ <미생> 윤태호 작가
⑤ 박찬일 셰프
⑥ 장성환 <스트리트H> 대표
⑦ 가수 & <해밀학교> 이사장 인순이
 




가수 인순이를 만나러 간다는 내게 지인들이 말했다. “인순이 언니의 몸매 관리 비결을 꼭 물어봐줘!”,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이 누군지 궁금해.” 보통 환갑을 앞둔 여가수에게 던질만한 질문은 아니지만, 인순이이기에 충분히 받을만한 질문.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순이’라는 브랜드의 나이와 이미지가 아닐까.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택했던 가수의 길. 혼혈아로 태어나 사회의 냉대를 극복하며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겪었을 고통. 그 모든 것이 응축되어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인순이라는 이름에서 ‘열정과 희망’을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가요계의 디바, 세대를 넘나드는 공감과 희망의 아이콘. 인순이를 수식하는 타이틀은 수없이 많지만, 그녀에겐 또 다른 직함이 있다. ‘해밀학교 이사장’. 해밀학교는 2013년 그녀가 설립한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기숙형 대안학교다. 내년부터 전면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보도되며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12월 초, 연말 공연과 방송 스케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방송국 앞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프로페셔널한 가수이자 여린 엄마, 그리고 다문화 학교 이사장으로서 인순이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 인순이 하면 저는 어릴 적부터 들었던 ‘밤이면 밤마다’가 생각나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은 ‘거위의 꿈’을 먼저 떠올린다. 가수생활 37년, 17개의 앨범을 냈는데, 대표곡으로 이 두 곡이 꼽히는 것에 불만은 없나? 좀 더 정성을 들였던 다른 곡이 조명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든지.

= 두 곡도 충분히 정성들였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다. 한 가수가 두 곡 건지는 것도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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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솝



- <거위의 꿈>은 원작보다 더 유명해진 리메이크곡이다. 음반으로 먼저 발매된 게 아니라고?

= 공연에서 처음 불렀고, 2005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신곡을 홍보하러 나가면서 불렀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 자신이 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기 때문에 젊은 청춘들에게 ‘꿈’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예상 외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엔 싸이월드에 배경음악을 까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거 하려고 사람들이 엄청 음원을 찾아다닌 모양이다. 저한테도 그 곡을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그래서 이듬해 2월에 팬서비스로 디지털싱글을 냈다. 11월에는 차트 1위를 했다. 원더걸스를 제치고.


- 특별히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 30주년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할 곡으로 어떤 게 좋을까 고르던 중이었다. 어렴풋이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이 부분이 생각났다. 당시엔 그 노래를 몰랐는데, 찾아보니 ‘거위의 꿈’이었다. 가사가 참 좋았다. 이 곡이 내 30주년 공연 마지막 곡으로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서 부르게 됐다.


- 조PD부터 최근에는 키썸까지 많은 후배들과 콜라보를 했다.

= 한 것마다 잘 되어서 많이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 후배에게 인기가 많은 선배로 유명한데,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후배가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 많다. 많아서 다 못한다. 이 사람이랑만 하면 다른 사람한테 미안하지 않나. 그래서 오히려 더 못하고 있다. 최근에 같이 무대에 올랐던 키썸은 우리 딸과 동갑이다. 완전 꼬맹이다. 딸 같은 친구가 장문의 글을 보내서 같이 하자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아티스트라면 자기만의 노래와 무대, 대중의 사랑에 대한 독점욕 같은 게 있을 법 한데, 콜라보 무대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 트렌드를 읽을 수 있어 좋은 기회이고, 나도 공부하는 기회가 된다. 후배들과 소통이 된다는 점에서도 좋은 것 같다.


- 판소리부터 팝, 발라드, 댄스, 디스코, 재즈, 트로트까지,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다. 어머니가 애청하는 ‘가요무대’에 출연한 걸 봤다. 아이돌과 나란히 ‘뮤직뱅크’에도 출연한다. 세대를 넘나드는 가수는 쉽지 않은데, 어떤 비결이 있을까?

= 그저 팬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다 불러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됐다. 즐겁고 행복하려고 공연을 보러오는 것이다. 그 순간 다른 건 잊고 한 번 푹 빠져보려고. 그런데 내 노래, 내가 좋아하는 장르만 고집할 필요가 있나? 나와 팬들이 같이 행복해야지. 같이 즐거워야 하니까, 콘서트하면 트로트부터 댄스, 발라드, 팝, 다 한다.


- 어떤 요구가 올 때 특별히 거부감을 안 갖기 때문이다?

= 그렇다. “이런 건 안 해’라는 건 없다. 다 음악이지 않나. 오히려 내가 못해서 못하는 거지 안 해서 못하는 건 없는 것 같다.


- 못하겠다, 두렵다 싶은 것도 있나?

= 못하는 것, 당연히 많다. 다만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백 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굳이 필요 없는 건 하고 싶지 않다. 무대에서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준비를 하는 건데, 사람들이 몰라주면 소용이 없지 않나. 그래서 약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 필요한 거다 싶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걸 배우고 연습해서 한다.


- 그 중에서도 잘 맞는 장르, 편한 무대가 있을 법 한데.

= 연습하면 잘 맞아진다. 필요에 의해서라도 연습하면 다 잘 맞게 된다. 가사가 좋으면 어떤 장르의 곡이라도 금방 가슴에 와 닿기 때문에 표현하기가 쉽다. 관객이 전혀 모르는 곡이라 하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곡, 내가 공감시킬 수 있는 곡을 선택하는 편이다.
<거위의 꿈> 같은 경우는 저의 팬들이 많이 몰랐던 곡이다. 길고 느린 곡을 느긋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좀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이해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불렀다.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씹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이 가사를 바로 소화시킬 수 있도록 잘근잘근 씹어서 전달한다.


- 평소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 전달력이 참 좋고 인생을 통과해서 노래가 나온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감정을 끌어낼 때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 않나?

=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노래가 맛이 없다. 후배들에게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경험을 빨리빨리 흘려보내지 말고, 잠시 가슴에 담아뒀다가 내보내라고 얘기한다. 적어도 예술을 하려면 그래야 하는 것 같다. 하나하나의 경험이 내가 하는 것에 다 표현이 되니까. 아픔은 또 견딜 만큼만 주신다지 않나.


- 그런 면에서 예술가에게 인생을 빚지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 그것도 우리들 몫이다. 아픈 걸 토해냄으로써 또 사랑을 받는 거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이 그런 척 하면 진정성도 없고, 깊이도 없지 않나.


- 37년차 가수로 그간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업의 변화를 누구보다 피부로 느낄 것 같다. 가수에 대한 인식과 처우,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 시스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는지 궁금하다.

=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매니지먼트도 그냥 우격다짐으로 했다고 할까? 그냥 밀어붙이는 거였다. 지금은 빅데이터 같은 것도 보면서 연구를 많이 한다.
옛날에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가수를 했다. 발굴해서 만드는 것까지는 생각 못하고, 노래를 잘하니까 음반을 내줬다. 지금은 길거리 캐스팅도 가능한 시대잖나. 가능성 있는 사람을 픽업하고 만들어서 무대에 올려 보내는 시스템이 있다. 가수 공부를 시키고 외국어까지 가르쳐서 내보낸다. 옛날보다 더 체계적이다.
사실 우리 때는 음악을 배우지 못하고 노래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그걸 가슴으로 불렀다. 이론으로만 접근하기 보다는 몸소 겪으며 노래를 하는 사람이 롱런할 수 있는 것 같다. 기교가 많이 없어도 작곡가가 원하는 부분에 충실하게 자기 감성을 얹어서 부르는 가수가 더 길게 가고, 결국에는 슈퍼스타로 남는 게 아닐까. 그래도 어떤 게 더 좋은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이 많다.

= 너무 많아서 그게 참…. 한순간에 성공하고 싶다거나 ‘안 되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한다. 연습생은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에 선발되어 가수로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 년 간 데뷔한 팀 수를 두고 봤을 때 과연 몇이나 살아남나. 나머지는 다 탈락하는 거다.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가수 생활을 한 후에는 눈이 높아져서 그 다음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러다보면 좀 허황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좀 걱정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작년에 1등한 사람이 누구였지? 지금 활동을 하나?’ 생각해보는데, 거의 없다. 1등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데, 2, 3, 4, 5등은 오죽할까. 방송국마다 오디션이 여러 개다. 본선에 간 최소 수십 명은 이제 뭔가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인정 안하는 상황이지 않나. 그 아이들의 인생이 잘되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잘못되면 그걸 인정하고 극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그 친구는 과연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 가수는 화려해 보이는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안정된 일자리나 급여를 보장 받을 수 없는 ‘불안정한 노동자’이기도 하다.

= 우리를 노동자로 인정해주나? 안 해 주는 거 같다. 그냥 특권층 같이 여긴다. 저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아주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 밑에 피라미드처럼 정말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보듬어주는지는 않는데, 노동자라는 표현이 나오니까 조금 그렇다.


-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무대에 서는 사람은 애매한 것 같다. 열심히 일해서 이 자리에 온 건 맞는데,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풍족하게 누리면서 노동자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하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다. 저는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안 해 버릇해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분들은 아마 노동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는 노동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게 참 쉽지 않다. 노래를 잘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이 계절별로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연령대 여성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대리만족을 느끼는지,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해야 한다.


-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6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낳으면서 경력단절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예계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한 분야는 아닐 텐데, 가요계에서 ‘중견 여가수’로 사는 것은 어떤가.

= 엄마가 돌아가신 날도 무대에 섰다. 하지만 저는 굉장히 낙천적인 편이라 ‘남자가 일하는 거나 여자가 일하는 거나, 뭐가 달라?’라고 생각한다. 남자도 일하다 보면 부모님 임종 못 지키고, 아이가 아파도 못 갈 수 있지 않나. 다만 우리나라는 여자들이 가정 일을 더 많이 하는 문화가 여전한데, 연예인 치고도 제가 좀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마음은 힘들고 아이 때문에 걸려도, 누군가가 막지는 않았다. 


- 인순이하면 파격적인 변신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박진영이 작사·작곡한 댄스곡 <또>를 발표했을 때, 탱크톱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에도 매번 변신을 시도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 그저 그 곡이 나한테 주어졌기 때문에 곡에 맞게 한 것뿐이다. 빠른 노래를 하는데 치렁치렁 긴 옷을 입고 나가기도 그렇고. 우리는 트렌드를 읽어야 하잖나. 패션리더이기도 하고. 느리고 웅장한 곡을 할 때는 정장이나 드레스를 입는다. 빠른 노래가 나오면 그 즈음에 유행하는 트렌드를 입혔다. 하나로 쭉 가는 것보다 그게 재미있더라. 이 노래 할 때는 메이크업도 화려하게 하고, 인터뷰 할 때는 좀 차분하게 하고, 분위기에 맞게 하는 게 좋다. 그게 트렌드에 맞게 보인 것 같다.


- 그런 삶이 피곤하지는 않나?

= 피곤하다. 하지만 재밌는 부분도 많다.
히트곡이 많진 않지만 지금까지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런 노력 덕이라 생각한다.


- 최근에는 보디빌더에도 도전했다.

= 변신을 위한 도전은 아니었다. 그냥 저와의 싸움이었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 모두 울면서 보냈는데, 올해 또 메르스가 왔다. 일주일 뒤부터 전국투어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부 취소됐다. 집에 있는데 어느 순간 소파에 앉아 리모컨만 돌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러다가는 내가 주저앉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와의 싸움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나를 컨트롤 하고 싶다. 나는 나를 이기고 싶다. 나에게 동기부여를 하자!’
사실은 몸을 만들어서 내년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트레이너가 몇 번 시켜보더니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 있냐고 올 9월 대회에 나가자고 했다. 길게 잡으면 더워서 못하고 추워서 못하고 힘들어서 못하고 피곤해서 못하고, 분명 이러다가 흐지부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하겠다고 신청서에 사인해놓고 3개월을 정말 죽어라 준비했다.


- 떨리지 않았나? 가수로서 섰던 무대와는 전혀 다른 무대인데.

= 이건 나만의 리그고, 스스로 완주하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남들이 못 알아보게 인순이가 아니라 김인순으로 등록을 했다. 그런데 이틀 전에 소문이 났다. 신문 한 곳에 기사가 나왔는데 ‘이런 건 금세 잊히니까’하며 신경 안 섰다. 그런데 당일 현장에 기자 50명이 왔다. 겁이 나더라. 앞에 5명쯤 남겨두고는 손이 막 떨렸다. 도망가야 할지 그냥 있어야 할지…. 왜냐하면, 나는 엄마이자 며느리이고 와이프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이도 있고. 대회에 나가려면 스포츠브라에 팬티를 입어야 하는데, 이 동영상이 죽을 때까지 인터넷에 떠다닐 테고 분명 안티는 소리를 높일 텐데, 어떡하지 싶었다. 출전 결심을 할 때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당일에 기자들이 몰려오니 자신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인순이 미친 거 아니야!” 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은 내거야. 완주해야해. 이제 30분만 있으면 끝나. 그냥 즐기자!’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무대에 나갔다. 악플이 무서워서 매니저에겐 인터넷도 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끝나고 보니 다 좋은 말만 있더라.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 뉴스 출연 요청이 왔는데 사양하고, 일주일간 아무 활동도 안 했다. 나를 홍보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부른다고 막 뛰어가지 말자, 스스로 해낸 것에 성취감을 느끼면 족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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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솝



- 특별한 도전이 또 하나 있다. 2년 전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나.

= 홀렸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10년 전쯤 당시에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어린 친구들과 같은 무대에 서고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서, 이게 내 몫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누고 돌려줘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부자가 되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나누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뭘 할까 고민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양로원을 하고 싶었다. 노인들 가실 때 품에 안고라도 보내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겨울이 되면 고아원 얘기가 많이 나오니 마음이 갔다. 5월에는 양로원, 12월에는 고아원, 몇 년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내 가슴에 와 닿았으면 실행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만 생각났던 것 같다. 그런데 2011년 라디오에서 다문화 고등학생 졸업률이 28%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 이게 내가 해야 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더라. 다문화는 나에게 좀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나를 설득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몇 달 동안 생각해보았는데, 단순하게도 ‘내가 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라는 이유가 남더라.
나는 롤모델이 없었다.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고 자랐다. 지금은 다문화 엄마들이 나를 보면 ‘우리 아이도 선생님처럼 됐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에게 한 마디 좀 해 달라’고 한다. 그런 말을 전부터 들어왔다. 내가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아이들과 함께 걸어주기만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아이들을 키울까 하다가 가장 질풍노도의 시기, 태풍 속에 있는 중학생이 좋겠다 싶었다.


- 북한이 남침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중2’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웃음)

= 그 무렵에는 아빠는 왜 하필 외국인과, 우리엄마는 왜 여기로 와서, 부모님은 왜 나를 낳으셨나, 별 생각이 다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을 안 하려 한다고 안 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깊게 고민하며 나를 뒤흔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느꼈다. 내가 결혼해보니까 그렇다. 사랑했던 사람도 살다보면 무뎌지고, 어느 때는 말다툼 하면 사네 못 사네 하게 된다. 어떤 경우는 이혼도 한다. 사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문제다. 물론 헤어지지 않고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면 좋겠지만, 지금 같은 100세 시대에 너무 안 맞는 사람과 100살까지 산다는 건 고문이지 않나. 오죽했으면 헤어지겠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인데, 죽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나. 그런데 아이들은 이해를 못한다. 엄마가 시집올 때는 친정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왔지 자기만 잘 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와서 보니까 환경이 너무 달라서 도저히 같이 살수가 없다고 하면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그냥 한다. “나는 그랬어, 뭐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걸 고민하니까 힘든 건데, 이건 두 남녀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소용돌이에서 조금 더 빨리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잘 살아야지 두 사람을 다시 붙여놓던지, 어느 한 사람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내가 잘 못 되면, 누구하도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 같아.” 그런 얘기를 해준다.


- 아픈 부분을 드러내는 건 본인에게도 상처일 텐데.

= ‘나도 나름 성공했는데 더 이상 다문화로 분류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이 일을 하게 되면 계속 얘기해야 되지 않나. 후원자를 만나면 이런 얘길 할 수 밖에 없다. 나조차도 숨기고 싶었던 아픔을 계속 끄집어내서 얘길 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왜 그 짓을 다시 해야 해,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건 내 딸한테도 감출 수 없는 모습이고, 그렇다면 오히려 드러내놓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팬들께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깊고 큰 것, 아픔을 감수하면서 이걸 선물로 드리는 것이 과분한 사랑에 대한 뜻있는 보답이 아닐까하고.


- 내년부터는 월 30만 원씩 걷던 급식비와 기숙사비도 폐지하고, 전면 무상교육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비인가 대안학교라서 정부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정은 어떻게 확보하나.

= 한 2년간은 후원 같은 건 생각 못하고 제가 돈을 댔다. 홀렸다고 했잖나. 홀리지 않고선 그런 일을 못 저지른다. 저는 셈이 그렇게 밝지 않고, 노래 외에 다른 경험은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건비가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다. 80%는 인건비더라. 여길 보면 여기가 부족하고 저길 보면 저기가 부족하고, 국어선생님 있으면 수학선생님 있어야 하고, 그런 거다. 2년 동안은 열심히 벌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많은 분들이 조언을 해주셨다. “다문화나 학교 밖 아이를 돌보는 일은 국민들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지 혼자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국민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서 이 아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여기 애들만 잘 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제 어깨에서 짐을 좀 내려놓고, 다른 분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참시키는 일은 후원이라고 했다. 만원이라도 후원을 했을 때 더 관심이 가고 걱정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맞는 얘기 같더라. 요즘은 누굴 만나면 “당신이 지난달에 썼던 것 중에서 1만원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시냐?”고 물어본다. 보통은 기억이 안 난다. 평소 생각 없이 마시는 커피 한 잔, 이런 게 모이면 우리에겐 큰 도움인데, 쓰는 사람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남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당신이 돈 많이 버는데 왜 후원을 받으러 다니나. 당신 사업을 우리가 왜 도와야 되느냐.” 이런 얘길 많이 들었다.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설명을 드렸다. 지금도 떳떳한 것은, 아직도 제가 보태야만 살림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남의 주머니에서 만 원 나오게 하는 게 정말 어렵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부를 때가 있는데, 시간 없다고 매니저가 딱 자르면 학교에 후원하려고 그런다고 한다. 안 갈 수 없어서 차려입고 가서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후원금은 제 출연료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일 때도 많다. 어떤 때는 노래도 한 곡 불러보라고 한다. 다문화에 기여하고 싶다면 돈을 더 얹어 줘야 될 텐데, 가수로 불러놓고 출연료마저 깎자는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내가 좀 더 일하고 말지’ 그런 생각도 든다. 처음엔 상처도 많이 받았다.
요즘은 자꾸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삼십 몇 년을 연예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다 내려놓아지지는 않는다. 어떨 때는 욱해서 그냥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정말 화려한 여가수로 죽고 싶은데, 학교를 해서 이런 일도 감당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학교에 가서 아이들 모습을 보면 또 홀려서 깔깔대고 기운이 난다. 만원도 감사합니다 하게 된다. 그러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내가 커피 한 잔 덜 먹지’ 싶고. 그래도 벌써 1회 졸업생이 나온다.


- 저출산이 문제라고 한다. 시골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못 들은 지 오래고, 활력 잃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한 아이가 참 소중한데, 우리는 여전히 ‘정상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만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폐쇄적 문화가 강하다.

= 2007년까지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이 2만5천 명이었는데, 지금은 25만이라고 한다. 2020년 쯤 되면 다문화 인구가 우리나라 전체의 20%가 된다. 아이를 안 낳으니까 2020년엔 인구절벽이 온다고 한다. 지금도 그 숫자를 다문화가 채워주고 있다. 인구 절벽이 되면 이민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 있는 다문화도 이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는데, 이민까지 시작되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빨리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우리아이들, 우리식구로 키워야 한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도 군대에 가고 있다. 이 나라를 지키는데, 국민으로 받아줘야지!
이게 엄청나게 큰일인데 사람들은 아직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가슴에서 일어나는 변화일까 싶기도 하다.


- 다문화 정책에 어떤 점을 제안할 수 있을까?

= 여기저기서 다문화 말은 많이 하지만, 유행처럼 다뤄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정부와 기업 등에서 다문화에 많은 돈을 쓴다는데, 예산이 어디에 잘 쓰이는지 확인도 안 되는 것 같다. 통계도 없다. 이건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한군데서 통제권을 갖고, 예산을 줬으면 어디에 쓰는지 파악하고,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문화 지원도 좋지만 맹목적으로 돕는 것은 오히려 부모가 아이에게 신경을 덜 쓰게 만드는 면도 있다. 여기저기 센터마다 프로그램이 다른데, 우리는 저거 왜 안 해주냐, 저기 안 데려가나,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감사한 마음보다 불만이 앞서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어찌 보면 다문화 가족보다 더 어려운 조손가정도 있는데, 다문화만 잘 해주는 것도 역차별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래서 해밀학교는 학교 밖 아이들, 중도입국 아이들, 탈북아이들, 또 뭔가 사랑이 필요하고 공부에 대한 불씨를 당겨 보고 싶은 아이들도 모두 받고 있다.
학교도 부모교육이 우선 되어야 한다. 아빠는 엄마와 아이가 엄마나라 말을 하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빠가 왕따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지만 한국말에 서툰 엄마는 아이와 깊은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엄마도 이 티가 맛있어” 정도만 말하는 것이지, 어떤 차를 몇 도의 물에 몇 분을 우려냈을 때 맛있다는 설명은 해줄 수가 없지 않나. 아이는 학교에 가면 노는 단어를 쓰고, 교과에 있는 단어는 모르게 된다. 요즘 공교육이라는 게 상위 몇%는 학원에서 이미 다 배워서 가고, 선생님은 중간에 있는 아이만 데려가지 밑에 있는 애들은 못 끌고 간다. 거기에 대체로 다문화 아이들이 있다. 그 수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서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다면 큰 문제다. 나라의 미래가 아닌가. 몇몇 사람만 잘해가지고 어떻게 이 나라를 끌고 가나. 반드시 애국심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공동체의식은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나.



묵직한 질문을 남긴 인터뷰였다. 그녀는 생방송을 위해 급히 일어나야했지만,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못다 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그녀의 행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리라.

녹취 타이핑을 마치고 커피를 한 잔 하기 위해 일어났다. 마침 TV에서는 프랑스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파리 테러 후 한층 강해진 반(反)이슬람, 반이민 정서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현지에서 나고 자란 이민 2, 3세가 자국민을 상대로 한 테러에 가담했고, 공포에 잠식당한 프랑스인 상당수가 그들의 자부심이자 국민성으로 불리던 ‘똘레랑스’를 내팽개치고 극우를 택했다. 다문화 정책의 실패가 낳은 참혹한 현실을 보며, 인순이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엄청나게 큰일인데 사람들은 아직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인터뷰 및 정리: 최해선 선임연구원, 박다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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