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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생활 속의 인문학, 인문학적 글쓰기 - 2013. 11. 30

더연 / 자료실 / 2013.12.09 121.131.233.140

생활 속의 인문학, 인문학적 글쓰기
- 특강. 서원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백운복 교수. 2013년 11월 30일 -

지난 11월 30일 저녁 6시,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회의실에서는 더연 청년칼럼니스트, 청년네트워크 특강(11월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백운복 교수님께서 생활 속의 인문학, 인문학적 글쓰기라는 주제로 인간의 삶에 수원(水原)이 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인문학적 글쓰기의 방법은 무엇인지 강연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번 강연에서는 더연에서 청년의 목소리를 내며 활동 중인 칼럼니스트들의 글을 첨삭 받는 소중한 시간도 함께 했습니다. 아래 강연 전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Ⅰ. 생활속의 인문학


들어가며

영광스럽습니다. 박수를 다 오랜만에 받아보고. 뭐 이런 거창한 자리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거짓이니까(웃음) 이런 조촐한 자리 저를 끼워주셔서 즐겁습니다. 이게 제 진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인문학의 시작입니다. 솔직함. 네 마음 얘기해봐. 그러면 99.9%는 거짓이고 상대가 뭘 기대할까를 생각하면서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건 인문학이 아니죠. 저도 학생들.. 제가 조금 젊어 보이겠지만 제가 내년에 환갑인데 교수생활 지금 29년째입니다. 일찍 출세해서 스물일곱부터 교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뭐 박정희 시절에 학교를 다녔고 박정희 시절에 군대를 만 3년에서 1개월 10일 줄여주는 교련을 열심히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군대생활을 했고 하루에 평균 16대를 3년 동안 엉덩이를 맞으면서 한 달에 한번쯤은 엉덩이 맞은 자리에 피가 엉겨서 팬티를 갈아입지 못한 그런 일병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내 선배들은, 60년대 학번들은 4.19때 군대생활하고 그런 친구들은 불구가 되거나 죽은 사람들은 내 형님들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과 학생들 군대 간다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면 제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걱정하지 말라고 열심히 군대 생활하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교수님 왜 이러시지 이러실 분이 아닌데 근데 마치 내가 군대 생활하던 시절이 생각이 나가지고 나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하여간 이 친구는 다녀와서 복학하면 저한테 와서 그럽니다. 2년 동안 한 대도 맞은 적이 없고 욕 한번 들은 적이 없다. 그래, 이건 국가에 감사해라 그리고 네 선배들이 맞은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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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마음속 공간에 무언가를 담으려고 하는 추상명사

지금 제가 왜 이렇게 서론을 여기(자료)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꺼내냐면 이게 인문학이에요. 여러분 여기 왜 앉아 있습니까? 제 강의 들으려고, 혹은 저 팀장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더 보이지 않는 속셈의 보이지 않는 것이 도사리고 있겠죠. 최소한 입시에 혹시 시험 나올까봐는 아닐 거 아니에요. 또는 이것이 스펙이 되어서 내가 먹고사는데 혹은 취업하는데 혹시 점수가 조금이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앉아있습니다. 그냥 이 모임에 열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그 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든 여러분들이 선택한 거고 그 마음속에 작은 공간이 있겠죠. 거기에 무언가를 담으려고 하는 그 막연한 추상명사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좋은 토요일 저녁에 여기 와서 앉아 있는 자체가 여러분의 선택이죠. 세상에 쓸데없는 선택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미세한 동물들, 소충들도 수많은 판단을 하고 있잖아요. 여기로 갈까, 저기로 갈까 조그만 개미 한 마리도. 결국 수많은 선택이죠.


인문학은 계산기를 덜 두드리며 가는 것

그 선택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무식하게 가는 사람도 있고 계산에 치중하면서 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인문학은 계산기를 덜 두드리면서 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문제제기 해가지고 프린트 물에 간단하게.. 맹숭맹숭 있는 것 보다는 뭔가 학생들이 하나씩 가지고 만지작거리며 있는 것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제가 지난주에 연구실에서 혼자 고민하면서 그냥 도닥거려본겁니다. 간단히 키워드만 가지고 제 생각을 여러분에게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 전공이 또 현대문학이고요 그중에서도 비평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비평은 비판하는 자라는 뜻이거든요. 삿대질 하는 자. 그래서 학생들에게 내 전공이 비평이다 나에게 삿대질 좀 받아라. 농담으로 그런 얘기 자주 합니다.


인문학은 수원(水原), 물의 원천이다

인문학의 핵심이죠. 인문학의 가장 중앙에 들어있고 핵심에 들어있는게 여러분 뭐 얘기하는 문사철이잖아요. 문학, 사학, 철학. 그게 이제 어학이 들어가야 되겠죠. 제가 여기에 명기해놓은 것처럼 언어, 문학, 사학, 철학이 인문학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지류죠. 그래서 결국은 이것 없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물의 원천이고 그래서 수원(水原)이다. 그리고 수원 하니까 여러분들이 굳이 지금 이 상황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정치, 경제, 사회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죠. 여러분들은 수도꼭지에 비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수원이 오염되면 물은 당연히 오염되는 게 나올 수밖에 없죠. 또 수도꼭지에 녹이 많이 슬어있으면 아무리 수원이 제대로 깨끗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거기에 납 성분도 들어가서 나타나게 될 겁니다. 우리가 정치와 사회가 그것을 증거 하고 있죠 사실은. 이런 얘기들을 주목해보면서 오늘의 문제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이다 - 느끼면서, 감각하며 살아가는 것

특히,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인데 그냥 살아가는 건 인문학이 아니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감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인문학이죠. 근데 인간은 어차피 느끼면서 살아가잖아요. 아까 제가 모두에 얘기한 것처럼 내가 여기에 왜 앉아 있는가. 또 오늘 못 보던 얼굴이 있네? 백운복이라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이 많은 것의 느낌이 인문학의 시작이고 지금 여기는 인문학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런 생각을 갖고 문제에 다가서려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예를 통해 다가가기라고 써놨는데요. 뭐 이런 예가 인문학을 이해하는데, 인문학적 글쓰기를 여러분들이 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물의 원천에 축 젖어있어야만이 수도꼭지를 틀어도 글이 잘 나올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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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통해 다가가기 1 - 광어와 도다리

예를 통해 다가가기에서 광어와 도다리의 예를 제 연구실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수족관에 있는 광어, 도다리 혹은 바다 속에 살고 있는 광어, 도다리. 영어로 광어나 도다리가 스펠링이 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수족관에 있는 광어나 도다리나 바다 속에서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 그 광어나 도다리나 영어 스펠링은 똑같을 겁니다. 우리나라 언어로도 다 똑같이 광어나 도다리죠. 다 똑같잖아요. 그런데 엄청나게 다른 거죠. 어찌 수족관에 있는 광어가 바다 속에 살고 있는 광어하고 똑같겠습니까. 수족관에 있는 광어는 상품이고 물건이죠.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죠. 그러나 바다 속에 있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잖아요. 이건 완벽하게 다른 거죠 조금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만 가지면은 이따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니까요.


예를 통해 다가가기 2 - 소금과 황진이

그 다음에 저는 문학선생이다 보니까 소금. 소금은 NaCl이죠. 그런데 여러분 중학교 때 배웠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보면 그 하얀 메밀 꽃밭이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표현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보세요. 만약 초등학생이 그 글을 읽었다면 선생님 이런 말이 어디 있어요 라고 질문할겁니다 당연히. 아무리 그 메밀꽃이 달밤에 하얀 빛깔로 반짝인다 해도 그것은 메밀꽃이지 어찌 소금입니까. 소금을 뿌려놓다뇨 말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온통 비유의 인생, 비유의 생각이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죠. ~ 같다. 우린 그렇게 얘기하는 게 일상화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멘토를 향해서 닮고 싶어 하는 것도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마이너스 적인 인물을 향해서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결국은 비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 비유하는 인식 자체가 이미 인문학입니다.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그것도 무언가의 언젠가의 비교와 비유 속에서 나타나는 거죠. 완벽한 독자적인 기분 좋음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잖아요. 아 쟤 참 예쁘다. 무언가 전제가 있으니까. 조선시대 최고의 미인인 황진이. 그것은 제가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야사들을 통해서 봐도 미인 기준을 찾아보면, 온통 유사이래 조선시대 정조 시대 이후부터 황진이가 샘플이에요. 최고의 미인. 그래서 제가 황진이 시조를 아주 좋아합니다. 황진이 시조를 연구하는 글도 써본적이 있고. 여러분들이 아는 것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정도 배우셨겠지만, 그 시조는 황진이 시조 중에 제일 하급이고. 더 노골적인 시들이 많습니다. 차마 교과서에 실을 수 없으니까(웃음). 싣지 않은 거 같은데. 어쨌든 일곱 수 정도가 지금 기록으로 남아있어요. 일곱 수 만 황진이가 불렀겠습니까. 그 술자리에서 어제 했던 얘기 또 하니 이런 얘기 나오죠. 매일 새로운 시조를 창작해서 불렀을 겁니다. 그러니 수천 수를 불렀을꺼라고 생각을 해요. 그 중에 제가 황진이 시조에 몰입되면서 끽해야 45글자 내외인데 정양시조니까. 그런데 황진이를 모시는 사당이 우리나라에 일곱 군데가 있습니다. 다 자기들이 오리지널이라고 해요. 저희 학생들 답사 데리고 가면. 저기 강원도 강릉, 양양에도 있고. 전라도 순천에도 있고 전주 옆쪽에도 있어요. 그런데 사당에 초상화가 다 있습니다. 다 조금씩 달라요. 자기네가 오리지널이다. 증명할 수가 없죠. 그렇지만 기록에 나와 있는걸 다 데이터를 뽑아보니까 그렇게 조선시대를 휩쓸었던 미인의 상징인 황진이가 키는 152cm입니다. 몸무게는 68kg입니다. 몇 척, 몇 자 되어있는 것을 제가 환산해봤습니다(웃음). 지금 여기로 치면 아마 병원에 자주 다니고 성형외과 자주 다녀야 되겠죠. 이렇게 다른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아내와 요즘 잘나가는 친구들 얘기를 합니다. 70년대 80년대 같으면 TV에 나와도 만날 마당쇠만 할 사람이 지금은 다 주연이라고. 비교 개념이죠. 그래서 그런 개념도 제가 밑에 잠깐 언급해놓은 것처럼 다르다는 거죠.


예를 통해 다가가기 3 - 연예인의 눈물과 어머니의 눈물(인식태도와 가치추구)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OOO씨나 OOO씨의 눈물.. 여러분이 다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죠. 자주 TVN에서나 공중파 연예소식에서 자주 눈물을 보였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요즘엔 자주 안 보이는데. 한 7~8년 전만해도 눈물을 엄청나게 보였던 사람들이죠. 제가 이걸 갑자기 떠올려서 여기 써놓은 것은. 아마 7년 전인가 8년 전 인거 같아요. 이 OOO라는 사람이 자신은 운동해서 살을 뺐다. 그런데 성형외과 의사가 아니다 내가 썩션해서 빼줬다. 그래가지고 소송이 붙었어요. 그런데 연예가중계 나와서 OOO라는 여자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의사가 거짓말한다고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그래서 성형외과 의사가 못 견디고 소송을 더 강하게 했어요. 그래서 밝혀졌어요 직접 수술해준게.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OOO라는 여자가 공중파 SBS인가 MBC인가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 있었어요. 이 OOO라는 여자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이틀 후에 9시 뉴스 첫 초기화면에 경기도 광주 재수생들 기숙학원 거기에서 불이 나가지고 학생들이 11명이 죽었어요. 한 7년 전에 그게 9시 뉴스 초기화면에 떴어요. 저는 그 초기화면을 보는 순간 외쳤어요. X같은 기자XX들. 그 시커멓게 탄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그 어머니를 클로즈업 시켰어요. 9시 뉴스 첫 화면. 여러분 PD되거나 기자되면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런데 보세요. 그 어머니의 눈물, OOO라는 여자의 눈물 비커에 담아서 화학 분자식 끄집어내면 제가 화학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눈물 화학식 성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소금이 제일 많고 철분이 있고 인이 있대요. 근데 철분하고 인은 너무 미세하니까 소금기는 있고. 아 분자식은 그 OOO라는 여자의 눈물과 그 어머니의 눈물과 분자식은 똑같죠. 똑같을 거 아니에요 당연히. 하지만 그걸 어찌 같다고 생각할까요.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극단의 대조를 이루는 거죠. 이게 인문학입니다. 자연과학은 그걸 설명할 수가 없죠. 어떻게 설명할거에요. 자연과학은 이퀄일 뿐이죠. 그래서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태도와 가치추구에 관련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과 가치추구를 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살아가는 거예요. 밥 먹는 것, 숨 쉬는 것.


예를 통해 다가가기 4 - 장미와 진달래꽃, 분필(공유와 받아들임)

그 다음에 생각나는 대로 연구소에서 타이핑을 한 겁니다. 장미와 진달래꽃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저희 과 학생들에게도 제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대개 장미요 하는 친구들이 더 많은데 그렇지 않죠. 장미하고 진달래꽃은 각자 아름다운 것이지 장미하고 진달래꽃을 비교해서어떤 게 더 아름다운가 하는 것은 절대로 판단 할 수 없는 거죠.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여학생이 지난주에 나에게 진달래꽃을 한송이 선물했어요. 그럼 그때부터는 대개 장미와 진달래꽃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그러면 당연히 진달래꽃이 아름답죠. 근데 그 여자가 떠났어. 그리고 한 한 달쯤 있다가 다른 여자 친구가 뜻밖의 옛날친구가 장미꽃을 가져왔어요. 그 날부터는 또 당분간은 장미가 더 아름다워 질 수 있죠. 다시 말해서 대상이나 사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공유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마치 김춘수의 꽃을 연상시키는 거죠. 그게 인문학인 겁니다. 김춘수의 꽃을 가지고 인문학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것뿐만이 아니죠. 길고 짧은 거 어떤 게 기냐? 알 수가 없잖아요. 분필 가운데 툭 부러뜨려가지고 이거 기냐 짧냐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더 조그맣게 짤라서 물어보면 짧아요. 왜 짧으냐? 이미 부러지지 않은 분필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겁니다. 그런데 분필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친구한테 분필조각을 갖다놓고 물어보면 절대로 대답할 수 없죠. 아주 껑충 뛰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 저는 박정희 시대에 학교를 다녔고 마포경찰서도 몇 번 드나들어 봤고 또 군대생활도 했고 심지어 대학 시간강사도 박정희 시절에 출발을 했어요. 그래서 난 이 세상에 박정희만 없으면 우리나라는 천국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젊은 시절을 보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여러분들 나이만할 때 보낸 그 시절이 지금은 박근혜정권 어쩌고저쩌고 막 하지만, 지금은 그 분의 딸이지만 감사해요. 정말 자기 아버지를 안 닮아서 다행이다. 뭐 제가 1학년 때 학교 다닐 때는 캠퍼스에서 그분을 봤고. 제 선배니까. 전 서강대학 출신이고 73학번이에요. 박근혜 대통령은 71학번이고요. 그때 서강대는 하도 작아서 학생들이 서로 다 알아요. 괴수 딸이라고 학생들이 그랬어요 엊그제 일 같아요.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다 다르겠죠 평가가. 어쨌거나 그렇다는 거.


예를 통해 다가가기 5 - 빈부와 중산층, 춘향이와 몽룡이 그리고 향단이와 방자

그 다음에 빈부, 부자니 가난하니. 얼마 전에 우리나라의 중산층에 대해 경제지를 보니까 나와 있더라고요. 중산층의 개념 중형차를 몰고 32평 아파트, 수도권이내에서 살아야 하고 자식들 등록금 걱정을 안 하고도 살 수 있어야 하고 이게 중산층이래요. 그런데 유럽의 중산층의 개념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걔네들은 시사 월간 잡지를 하나 이상 구독해야 한다. 돈 하고는 전혀 관계없어요. 그 다음에 사회와 정치에 액티브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 이게 중산층이다. 우리는 다 돈으로. 이거.. 아직 멀었죠. 빈부 또는 행복에 대한 척도. 모두 다 다르죠. 행복하니?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거의 없지만, 세계에서 최빈국인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그런 곳에 가면 행복하니? 라는 질문에 6~70%가 예라고 대답해요. 참 희한하잖아요. 더 껑충 뛰어서 우스갯소리로 춘향이하고 몽룡이하고와 향단이하고 하나 놓고 방자하고 놓고 봤을 때 제 생각엔 향단이하고 방자가 더 행복했을 거 같아요. 둘이 얼마나 편했겠어요. 춘향이하고 몽룡이는 얼마나 처절했겠어요. 고통스러웠을 거 같아요. 보세요 다르잖아요. 얼마든지 가치척도가 다르다는 거. 바로 제가 얘기하고 있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공감하고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면은 우리는 지금 인문학의 바다를 수영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거 없어요 그게 인문학이에요. 우린 지금 논리가지고 인수분해가지고 그 다음에 분자식 가지고 얘기한 거 없습니다. 그냥 정서와 감성과 느낌과 공유 혹은 공감 이런 것으로 소통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인문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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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증명의 자연과학, 이해와 공감의 인문과학

그래서 제가 그 아래 간단한 정리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는 간단히 정리하면 자연과학은 natural science지만 인문과학은 영어로 보면 아주 재미있잖아요. human이에요. 자연과학은 nature라는 단어로 얘기하고 있지만 인문학은 human이라는 얘기를 해요. 다시 말하면 비교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nature라는 단어와 human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요. 외적 내적 이런 단어는 가능하지만 자연이라는 단어와 인간이라는 단어를 비교개념으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소유하고 얼마나 정복하느냐 미국적 사고방식이지만 정복하느냐에 따라서 human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떻든 human과 nature를 대비개념으로 산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고등학교 문과 이과처럼 나누고 대학도 문과 이과 이런 식으로 나누니까 대비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로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서 인문과학 보면 human science 심지어 문화라는 말을 씁니다. culture science도 인문과학의 줄임말이에요. 한단어로 humanities라고 하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은 제가 생각하기에 키워드 하나 explain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인문학은 explain이 아니라 understand 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explain은 설명하는 것이고 분석하는 것이고 증명하는 거지만 인문과학 즉 understand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야하는 인문과학은 설명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고 깨닫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거죠. 여러분들 지금까지 제가 한 얘기를 설명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이해하고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문학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자연과학, 가변적이고 관계와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인문학

자연과학은 영원히 static하죠.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존재물입니다. 실체죠. 여기 의자 책상 다 고정되어 있는 거죠. 그렇다고 고체만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인문과학은 언제나 flexible 하고 유동적이고 오늘은 이 친구가 앉았는데 내일은 다른 친구가. 그러다가 의자가 부러지고. 얼마든지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죠. 하지만 그 의자는 그냥 의자일 뿐입니다. 의자가 부러졌다 해도 broken chair일 뿐이지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니 더 큰 humanities를 보면 의자는 지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죠. 그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가야 하는데 플라톤의 세 개의 의자까지 얘기하면 문학 얘기하는 거 같아서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자연과학의 대상은 개체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인문과학의 대상은 항상 인간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연한 얘기죠. 자연과학은 개체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과학의 대상은 그 개체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겁니다.


물의 분자식을 분해하는 실험 -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

그래서 조금 다른 비유로 예를 들어 봅시다. 물을 실험실에서 화학과 학생들이 물의 분자식을 분해하는 실습시간에 실험실에서 물을 비커에 넣어서 증발시켜서 H2O가 나오도록 실험하는 시간이에요. 근데 한 녀석은 술 잔뜩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면서 실험해요. 그런데 정말 H2O가 나왔어. 근데 한 친구는 정말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했는데 H2O2가 나와 버렸어. 그러면 H2O가 나온 술 먹고 수업태도 불량이었던 그 친구를 그 실험실 교수는 그 친구가 실험결과 보고서가 제대로 나왔으니까 A+야.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했던 이 친구는 F야 결과가 잘못 나왔으니까. 이게 자연과학이에요. 그런데 인문과학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 친구는 비록 정답은 나왔지만 F야. 비록 정답이 나오지 않고 엉뚱한 답이 나왔지만 이 친구는 A+야. 그게 인문학입니다. 저는 문학 선생인데 학생들 시험 볼 때 거의 오픈테스트를 합니다. 정답이 없는 거니까. 한 학기 동안 너의 열정과 너의 상상력의 발동의 온도를 측정한다. 곧 학기말 시험을 보는데 이번학기에 시론을 가르쳤는데 시 두 편을 학생들 전혀 모르는 따끈따끈한 걸로 섀도우 캐비넷에 넣어놨어요. 두 편을 보여주고 이번에 할 게 내내 배운 시에 대한 너희들의 상식 그리고 수없이 가르쳐준 레시피에 맞춰서 시를 분석해 봐라. 거기에 맞춰서 연습 많이 했으니까 이제 너희가 셰프가 되어서 내가 보낸 이 도구 시 두 편을 보고 하나 골라서 50분 동안 요리해라. 그걸로 난 채점을 할 것이다. 대학생들 한 사십몇명 시험을 보는데. 왜 난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더욱이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야, 김동인은 어떤 소설을 썼어? 응, 맞았어. 이게 어떻게 인문학입니까.

조금 여담인데 제가 수능 출제를 한번 다녀오고 또 한 번 출제에 부를까봐 제가 열흘 동안 기대한 경험이 있는데(웃음). 그때 제가 가서 시를 7문제 출제를 했어요. 교수 생활 30년 동안 가장 고통스러운 체험을 얘기 해봐라 하면 지금도 그 경험을 얘기해요. 내가 수능 7문제를 더군다나 시를 출제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제가 낸 문제를 시험보고 들어온 우리 과의 1학년 학생에게 물어봤어요. 너희들 수능 뭐가 제일 어려웠냐 했더니 언어영역이 제일 어려웠대요 이구동성으로 국문과 학생이. 그래서 그럼 그중에서도 뭐가 제일 어려웠냐 했더니 시가 제일 어려웠대요(웃음). 아 여러분들 잘 걸려드는 구나. 근데 저쪽에 어떤 남학생이 어떤 XXX가 냈는지 말이야(웃음) 이러는 거예요. 귀에 살짝 들렸어요. 그래서 제가 고백을 했어요. 내가 그 문제 내느라고 한 달 동안 감옥살이 했는데 정말로 지금도 잠이 안 온다. 나의 그 어려운 문제를 너희들이 두세 문제 못 풀어서 혹은 틀려서 내 제자가 되지 않았느냐(웃음).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나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너희들 열심히 가르쳐주마. 어쨌든 지금 졸업해서 잘들 살고 있는 친구들 가끔 만나면 그런 얘기 하곤 합니다.


인문학은 밥이요, 숨쉬기 운동이다

어쨌든 보세요 그만큼 인문과학은 인간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항상 살아 움직이는 나 중심이요, 인간 중심이다 이거죠. 내 중심입니다. 내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죠. 당연한 얘기죠. 따라서 모든 대상은 주체인 나와 교류하면서 생명을 얻으며 비로소 그 의미를 형상화 한다. 이게 바로 인문학의 모습이죠. 예를 들어서 그녀. 남학생들이 많으니까. 제가 그녀라고 탁 던졌어요. 그녀 그러면 그녀가 참 예쁘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She is beautiful girl 이정도로. 그러다가 그녀가 정말 예쁘지 않니? 그녀를 떠올려봐. 그리고 한 30초 지나면 여기 남학생이 한 10분이라고 그러면, 10사람의 그녀가 이제 나타나는 거죠 갑자기. 각자의 그녀가 나타나지 어찌 똑같은 그녀가 나타나겠어. 10명이 한명 놓고 투쟁하게. 이 세상의 모든 게 그렇죠. 어머니, 다 다른 어머니가 있죠. 처음에는 막연하게 mother. 그러다가 한 1분만 지나보세요 내 어머니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거죠. 이게 언어의 심리학입니다. 결국 내 어머니죠. 당연한 얘기입니다. 처음에는 아버지 결국에는 내 아버지. 결국엔 모든 게 그렇게 떠오르는 거죠. 여러분 시속에 어머니란 단어가 나오면 처음엔 막연하다가 그 시를 감상하는 순간에 내 어머니와 자리바꿈 하는 겁니다. 내가 고아라면은 내가 체험했던 고아원 원장과 자리바꿈하는 거고 내가 천주교 신자라면 마리아와 자리바꿈할 수 있어요. 국민대에 계신 제가 아는 교수님 한분이 맨 마지막 정년 하실 때 아버지라는 시집을 냈어요.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목사님들이 당신에게 편지를 썼어요. 교회에 와서 아버지 얘기해 달라. 그런데 그 분 기독교 신자 아니에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얘깁니다. 만주 지방에서 큰 고생을 하셨던 자기 생부에 대한 얘기를 쓴 시에요. 그런데 그렇게 교회에서 불러요. 그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게 인문학의 생각이에요. 자유죠. 독서의 자유, 소위 독자의 자율성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아까 실험실 얘기했듯이 자연과학에서는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자연과학에서는 그래서 또 안 되는 거죠. 지금 얘기한 것을 간단히 마무리 하면 이런 겁니다. 인문학은 밥이요, 숨쉬기 운동이다. 이렇게 써놓고 우연히 보니까. 지역의 어떤 인문학 교수가 인문학은 밥이다라는 책을 냈더라고요. 제가 그것까진 몰랐어요. 최근에 나온 책인 거 같은데 컨닝한건 아니고. 그래서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행복실현에 얼마만큼 기여했는가. 되 질문 해볼 때가 되었다. 기여했다기 보다는 파괴했다는 생각이 이제는 들 때가 된 거 같아요.


인문학의 과제 - 인간의 행복추구, 과학의 발달로 상실되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고민

왜 사느냐의 공통분모는 행복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척도 또한 인간마다 다르며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공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또 인문학이 상실된 과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도처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그렇죠 인문학이 상실된 과학 얼마나 많습니까? 냉혹하죠. 무섭죠. 모두가 다 칼날이죠. 그렇게 멀리갈 거 없어요. 저는 요즘 스마트 폰이 이렇게 일상화 된 게 제 기억으로 기껏 6~7년 밖에 안 된 거 같아요. 그런데 참으로 재밌는 일이 제가 과거에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러 들어가면은 제가 출석을 불러도 1~2학년 들은 자기들 끼리 ‘야 어제 있잖아’ 와 그래서 ‘야, 이놈들아 좀 조용히 해’ 수업 들어가면 꼭 그런 얘기 합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은 한 시간에 조용히 하라는 얘기 수십 번 할 테고 대학교수는 그 얘기 좀 안하게 좀 해다오. 제가 우리 과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가끔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5~6년 전부터 벌어진거에요. 조용합니다. 강의실에 딱 들어가면요 4~50명이 지금 앉아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수강태도가 너무너무 준비자세가 조용해요. 왜, 스마트폰에 몰두 하고 있으니까. 난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나 조용해서 다들 정신차렸나보다 오늘 내가 강의할 내용을 미리 숙지해 와서 있구나. 엄청난 착각이었죠. 출석 부를 때도 계속(스마트폰). 저는 강의시간에 스마트폰이 울리면 그 학생 다음시간부터 수업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만한 예의도 지키지 않는 학생을 저는 제 제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과 학생들은 아주 조심합니다. 그래도 실수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어요. 그렇게 스마트폰 열심히 보면서 수업준비 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이 과학의 발달이 사제지간을 피폐하게 한거죠. 또 친구 간에 1주일에 한 번 만나고 하니까 얼마나 가깝게 얘기하고 싶어요. 차라리 떠드는 게 나은데 손톱이 사라지죠. 또 얼마 전에 모처럼 가족들하고 저녁 먹으러 조금 고급스러운 식당에 갔는데. 저쪽에 예약한 가족이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대학생부터 조그만 아이들까지 대가족이 모여서 모처럼 하는 식사겠죠. 그런데 거기서 참 저 가족들 부럽다 대가족이고. 그런데 저쪽에 그렇게 많은 가족이 있는데 조용해요. 그래서 나는 왜 그럴까 하고 보니까 다들 스마트폰 하고 있어요. 가족들이 삼대가 모처럼 모인 거 같은데 계속 스마트폰을 하고 있어요. 거기에 제 제자가 한명이라도 앉아있었으면은 내가 거기 가서 삿대질 했을거에요 할아버지 할머니 죄송합니다 하고. 과연 거기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틈새가 있을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과학의 발달이 과연 인간 행복이라는 등식을 이뤄냈을까. 이런 부분을 계속 고민해 보는 것도 인문학의 숙제입니다. 그런 점도 강조하고 싶어요.


생태학의 인문학적 사유 - 한 편의 시는 한 그루의 녹색식물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이 생태학이랍니다. 의과대학보다 더 높대요. 지원율이 훨씬 높고, 미래 학문이기도 하죠. 근데 미국의 생태학 책들 보면요. 제가 그 쪽에 관심이 있거든요. 문학은 인간의 생태니까. 그랬더니 이런 얘기들이 캐치프레이즈처럼 학술책에(교재 같은) 머리말에 항상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따옴표를 쳐놨습니다. “한 편의 시는 한 그루의 녹색식물이다” 번역한 것이지만. Poem이란 단어를 썼어요. 그런데 이건 진짜 시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인문학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제 미래는 이 지구는 생물이 살아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럼 인간의 마음에 생물을 심어야죠. 한 편의 시를 인간의 마음에 심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인간, 혹은 우주, 자연이, 이 지구가 좀 더 생존해 갈 수가 있다는 거죠. 심지어 자연과학의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태학자들이 한편의 시가 그리운, 물론 이 시는 =문학이면서 =인문학입니다. 바로 인문학이 지구를 마지막으로 구원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입니다.


생활속의 인문학, 그리고 남겨진 인문학의 여러 과제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남겨진 숙제가 뭐냐. 이것도 인문학으로 해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거죠. 인간은 왜 태초부터 있었을 자연의 순리를 왜 경이로워하지 않는가. 봄이 오면 꽃피고, 그거 옛날에도 피었어. 고조선 시대에도 피었어. 근데 여러분 새롭잖아요. 늘. 이야 꽃이 피었네. 이런 느낌 들잖아요. 안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들 겁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을 때 그 꽃이 피는 것과 그녀가 없었을 때 그 꽃을 바라보는 것 다르죠. 내가 양로원가서 그 꽃을 보는 것이 다르죠. 그래서 그 교류가 늘 살아있고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flexible과 organic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또 자연의 순리를 여전히 놀라워하는가, 사랑의 정서에 함몰되는가. 여러분 사랑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괴롭죠. 이 세상에 사랑에 대한 시가 제일 많은데 어느 나라나, 요즘 북한의 시들도 볼 수 있어요. 북한의 요즘 시들도 사랑에 대한 얘기 많이 합니다. 물론 김정은에 대한 사랑이든 뭐든. 그런데 항상 고통이야. 괴로움이고. 여러분 사랑에 대한 시는 항상 희열이고 extasy다 하는 시는 한편도 없어요. 아픔이고 고통이죠. 왜 그럴까? 그런데 왜 사랑에 몰입하려고 발버둥 칠까? 이걸 설명하는 건 특히 자연과학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 하죠. 이게 인문학이 있는 자리에요. 또 죽음의 공포를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끊임없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또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가. 그 해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지만, 인문학은 가장 원형적인 의문을 가장 진지하게 되질문 하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게 인문학이다. 얼마 전에 KBS에서 호모 아카데미쿠스 그거 본 학생들 많이 있으시겠죠. 각 나라들 다니면서 왜 한국은 부끄럽게도 강남 학원가를 촬영을 해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 약간은 슬픈 조망을 한 거 같은데. 각 나라들 이슬람, 중국, 인도 등등 찾아가면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이에요. 미국의 예일 인가 하버드 다니는 친구들을 나래이터로 해가지고 거기 한국 2세도 있었죠. 그런데 그 시리즈물의 마지막 결론이 뭐냐. 공부란 무엇인가 = 질문과 호기심이다. 맞는 얘기 같아요. 제 학생들한테도 많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결론은 질문과 호기심입니다. 이것이 공부다. 인간은 왜 공부를 하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진 인문학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결론입니다. 맞는 얘기죠. 인문학은 인류의 학문적 발달 측면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희랍에서 처음으로 대학이 생겼을 때, 무슨 학과가 생겼나. 철학, 문학, 수학과가 생겼죠. 그때 철학은 문학과 사학이 포함된 철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인물이지만 우리 문학에서도 가장 첫 번째 나타나는 문학의 이론의 기초를 항상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을 합니다. 같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문학과 철학은 처음에 한 몸인 거죠. 그래도 여전히 자기들만의 관념적 학문 영역이 되어 고고한 척 버티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걸 저는 강조하고 싶었어요. 인문학자들의 문제가 너무 많다. 여러분 철학강연해주는 사람들, 문학강연해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인문학 강연해주는 사람들 요즘 TV에 엄청나게 인문학이 특강해서 나오잖아요. 인문학을 가르치고 전공하는 나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요. 딱 보면 너무 잘난체. 니들 모르지? 이런 거. 교수 생활 30년 하면서 가장 경멸하는 교수가 그런 거예요 니들 모르지? 넌 알았냐? 넌 그만할 때 알았냐? 그 얘기 하고 싶어요. 제가 시를 전공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외부에 특강도 많이 하지만요. 제가 가르치면서도 항상 그래요. 내가마치 그걸 깨달은 것처럼. 그거 절대 아니다. 난 앞서간 사람들의 얘기를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해서 전달자의 역할만 하는 거다. 전 그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대부분의 소위 교수라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그걸 처음으로 정립한 거처럼 니들 모르지? 전 이런 교수들을 가장 경멸합니다. 그런데 요즘 인문학 쪽에 자꾸 TV에 나오는 선생님들이 그러려고 하는 거 같아서 못마땅해요. 그래서 제가 요새는 삿대질도 해보고 싶어서 제목도 생활 속의 인문학 이렇게 쳐본거에요. 고고한 척 버티는 것이 문제다. 생활 속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기에 와있다. 오늘도 우리는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Ⅱ. 인문학적 글쓰기


들어가며

인문학적 글쓰기 말 자체가 막연하긴 합니다만은. 제가 호주에 1년 교환교수로 가있었는데 거기 보니까 도서관에 한 층이 몽땅 다 Writing 책이에요.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글쓰기 책들이 있었어요. 거기는 그게 필수입니다 학생들한테. 제가 가있는 대학이 호주 그리피스 대학이라고 해서 학생수가 4만 명이 넘는 엄청 큰 대학이에요. 거기에 세계 각지 사람들이 다 있죠. 가장 개판이 한국학생들인데(웃음). 어쨌든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글쓰기가 다 필수에요. 이걸 통과를 못하면 2학년 진급을 절대로 못해요. 우리나라는 교양 필수라고 해도 4학년 졸업 전에 턱걸이로 해도 관계없잖아요. 그런데 얘네 들은 학년을 올라갈 수 가 없어요. 그래서 보니까 그렇게 많은 글쓰기 책들이 있구나. 그래서 제가 가기 전에도 학생들한테 논술 글쓰기 이런걸 늘 가르쳐 왔기 때문에 제가 1년 동안 별로 할 일도 없어서 거길 매일 뒤적거리곤 했어요. 여기서 이제 보니까 글쓰기 교육을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걸 좀 아이디어도 얻고 해가지고 제가 귀국해가지고 책을 하나 쓴게 글쓰기 이렇게 하면 된다 하는 아주 평이한 제목으로 낸 것도 있고요. 그걸 가지고 제가 저희과 학생들에게 교재로 써서 가르치고 있습니다만은 그 책에 있는 내용을 키워드 키센텐스 중심으로 목차 중심으로 써놓은 겁니다 사실은. 그래서 뭐 자세한건 참고하시려면 알아서 보시면 될 거구요.


글은 소통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이다 - 글의 탄탄한 구조와 공감의 중요성

간단히 제가 말씀드리면 글은 소통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이다. 그리고 가장 쉬운 양식이기도 하죠. 보편적이고요. 특히 인문학적 글쓰기는 분석하고 설명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이어야 한다. 앞에서 그만큼 인문학적 인식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 칼럼니스트 들이 쓴 글은, 독자를 향해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던져줘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죠. 그런데 1차적으로 제가 되어봤는데 조금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1차적으로 어떤 것이 갖춰져야 하는가.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가장 필요한 정답입니다. 우선 탄탄하게 잘 짜여져 있어야 합니다. 또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글이어야 합니다. 니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냐. 이게 명확히 드러나야지, 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저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치기를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 건지 박쥐처럼.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이거 많죠 우리나라에. 이거 안 된다는 거죠.


살아있는 글 - 패러다임 쉬프트를 통한 참신하고 창조적인 글

그 다음에 저는 주장하고 싶은 게 세 번째입니다. 참신하고 창조적이어야 해요. 너무나 뻔한 얘기, 누구나 하는 얘기, 신문에서 만날 보는 얘기, 친구들에게 만날 듣는 얘기, 그거 언어로 옮겨놨다고 해서 글이 되는 거 절대 아닙니다. 참신하지 못하고 창조적이지 못하다면 절대로 그런 생명을 얻지 못해요. 그게 더군다나 칼럼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요즘 아주 인기 있는 단어입니다. 이거 인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위 관점을 바꿔보는 것. 새롭게 보아내기. 남들이 미처 못 본걸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보아 내는 겁니다. 그냥 보는 것은 칼럼니스트들이 할 일이 아니에요. 보아 내야 합니다 남들이 못 본걸. 그래야 그게 살아있는 글이 되는 거죠. 남들이 보는 거 똑같이 보면 그건 칼럼니스트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할 수 있어야. 그래서 보아내는 것, 관점을 바꿔보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해요. 이 점을 굉장히 강조 하고 싶은데요. 예를 들어서 어떤 아줌마가 싱크대 문을 팍 여는데 청소하려고. 그런데 거기에 바퀴벌레가 엄청나게 있어요. 으아악, 놀랐어요. 그 바뀌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웃음). 이런 게 관점 바꿔보기에요. 그런데 누구도 그런 생각을 너무나 당연한 건데도 잘 못하죠. 심지어 요즘 공익광고로 자주 나오는 거 있죠.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지? 물. 그런데 어떤 꼬마가 봄이요. 너무 당연한 얘긴데 그 조금 비틀어 보는걸 잘 못하는 거예요. 왜? 인문학이 죽어있기 때문에, 상상력이 죽어있기 때문이에요. 상상력을 발휘하려하면 야 이 자식아, 그건 시험에 안 나와. 그건 취업하는데 네 스펙에 아무것도 필요 없어. 무섭죠. 바로 그 얘기를 너의 꿈은 사이코패스라는 글에 잠깐 담으려고 했는데 좋습니다. 그 얘기는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요.


필요한 말은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라

그리고 필요한 말은 필요한 만큼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 A4 용지 한 장 정도라고 하면 A4용지에 담을 만큼의 말을 선택하고 담을 만큼의 아이디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 아이디어는 A4 용지 5장을 써야 되겠다, 이 아이디어는 반 장 이면 되는데. 그런 생각. 그런 게 잘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문학작품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장편소설 감인데 단편소설에 담았네? 아 이건 단편소설 감인데 장편소설에 담았지? 이건 1차 탈락입니다. 제가 심사 여러 번 하는데 그런 건 1차 예선 탈락입니다. 이런 부분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글쓰기의 전제 - skill과 strategy

그 다음에, 그 호주에서 제가 겪은 게 글쓰기 책들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키워드 용어가 뭐냐 하면요. skill 이란 단어와 strategy라는 단어에요. 글쓰기 책마다 그 단어는 다 강조되고 있어요. 작문은 skill이다 타고난 재주가 아니다라는 거죠. 그 다음에 strategy 전략이다. 그래서 전략을 잘 짜면 좋은 글 누구나 그들이 서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글쓰기의 전제입니다. 숙련이고 기술이고 전략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제 책에다가 글쓰기 전의 전략과 글 쓰는 도중의 전략과 글 쓴 후의 전략으로 전략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책을 썼고 그런 전략으로 임한다면은 정말로 살아있는 생명이 움틀 거리는 글을 얻을 수 있다. 이게 제가 말 하고자 하는 결론입니다.


글 쓰기의 전략 3단계 - 1. 글쓰기 전의 전략(outline 짜기)

그래서 글쓰기 전의 전략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으로 고민하라는 거죠. 막연하게 하지 말고. 그 다음에 글쓰기 중의 전략은 워드작업 진행 중일 때 또 전략을 짜는 거예요. 글쓰기전의 전략은 워드치기 직전까지 짜는 거고요, 글쓰기 중의 전략은 지금 워드작업을 하면서 짜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쓰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전략적으로 쓰고 있는 거죠. 그 다음은 여러분이 중고등 학교 때 배운 퇴고와 비슷한 개념. 글쓰기 후의 전략. 어떻게 쓰여졌는가 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검토해라. 그러면 이 세 개의 전략을 잘 수행하면은 훌륭한 글이 될 것이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그래서 글쓰기 전의 전략은 주제를 설정해야 하고 => 글 쓰는 정황을 인식해야 하고 => 뒷받침 제재를 잘 마련해야 한다. 소견논거와 사실논거를 잘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에 Outline을 잘 작성해라, 설계도를 잘 작성해라. 설계도를 작성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절대로 좋은 글 쓸 수 없습니다. 내가 이 글을 이렇게 설계해서 써야 겠다. 서론에 이런 얘기 할 거고, 본론에 이런 얘기 할 거고 본론에서는 이 세 가지 얘기를 진행할 건데 어떤 얘기를 제 1번으로 진행할까. 이것도 다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뭔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전략적으로 설계도를 짜야 합니다. 그것을 Outline이라고 하죠. 그래서 Outline 작성할 때도 주제가 선정되어야 하겠죠. 그 다음에 주제에 종속되는 논점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 주제를 설정해서 이러이러한 종속의 논점들을 가지고 주제에 접근해가야 하겠다. 다 계획이 서는 거죠. 또 각 논점마다 세부항목이 마이크로 하게 설정이 또 되어야 겠죠. 그 다음에 그것들을 목차로 작성하면 설계도가 작성되는 겁니다.


글 쓰기의 전략 3단계 - 2. 글쓰기 중의 전략(긴밀하게 연결하기)

그 Outline만 고심해서 정리가 잘 되면은 그거 왼쪽에 넣고 노트북 왼쪽을 수시로 쳐다보면서 워드 작업을 하는 거죠. 이 워드 작업을 치는 순간에는 어떤 전략을 가지고 고민하느냐. 이게 두 번째 글쓰기 중의 전략입니다. 이걸 계속 염두에 두면서 설계도 보고 건물을 짓듯이 Outline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워드작업을 진행해라. 또 정확하고 효과적인 문장인지를 계속 되새김해라. 그 다음에 주제는 전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그 주제를 위해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거니까. 바로 내가 얘기하는 이 주제를 독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 당연한 답이죠. 그 다음에 한편의 글은 여러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 그런데 단락마다 소주제문이 있는 겁니다. 한 단락마다 소주제문이 하나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한 단락에 소주제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게 2~3개씩 있고 심지어는 하나의 단락에 소주제문이 없어.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단락의 소주제문 그리고 그 소주제문을 뒷받침하는 뒷받침 문장들 이런 것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어야 하겠죠.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밀착된 밀착도를 가지고 문장이 연결되어져야지 탄탄한 글이 되는 거죠.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단락과 단락간의 유기적인 연계성. 첫 번째 단락, 두 번째 단락, 세 번째 단락 간의 유기적인 탄탄한 연계성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만이 글 쓰는 도중에 탄탄한 글로 이끌어질 것이다 라는 거고.


글 쓰기의 전략 3단계 - 3. 글쓰기 후의 전략(필자의 역할에서 독자의 역할로 자리바꿈 하기)

그 다음 마지막에 글쓰기 중의 전략에 의해서 글쓰기가 이뤄지면은 초고가 완성이 되는 거죠. draft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아직 완성된 글은 아니고 초고 작성이 끝나는 거죠. 그 때 이제 퇴고를 하게 되는데, 그게 글쓰기 이후의 전략입니다.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점검하면서 고쳐 쓰기를 하는 거죠. 그 서양의 글쓰기 책들은요 여기 이 세 가지 전략 중에 무엇을 가장 강조하는가 하면은 마지막을 가장 강조합니다. 우리하고 좀 달라요. 제 생각엔 첫 번째를 강조하고 싶은데, 서양의 글쓰기 책들 보니까 거의가 다 맨 마지막 단계를 가장 강조해요. 그런데 그것을 강조하면서 계속 쓰고 있는 용어가 Good writing means rewriting. 좋은 글은 고쳐 쓰기 rewriting을 다시 쓰기 보다는 고쳐 쓰기로 저는 번역합니다 문맥상. 좋은 글, 훌륭한 글쓰기라는 것은 고쳐 쓰기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세 번째 전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첫 번째를 강조 하고 싶은데, 그렇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글쓰기 후의전략.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점검해야 하는데. 여기 주로 칼럼니스트 들이 많으니까 수없이 체험했겠지만. 자기가 써놓고 어찌 안 읽어보겠습니까. 당연히 읽어보겠죠. 그렇지만 안보입니다. 안보여요. 절대로 안보여요. 그때 보이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루 묵혔다 봐야 해요. 하루쯤 뒤에 봐야 되요. 하루쯤 뒤에 내가 이글을 썼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경향이나 한겨레에 실린 비평을 독자가 되어 읽는 다는 완벽한 자기와의 분리 속에서 그 글을 읽어야지 조금이라도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안보여요. 그래서 제가 그 괄호 속에다가 그렇게 써놨습니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간과 거리두기가 이뤄져야만 하고, 또 필자의 역할에서 독자의 역할로 자리바꿈을 해야 한다. 그것을 꼭 해야만 하고 쉽지가 않습니다. 정 안되면 다른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해야 합니다. 그 대신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있는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하는 게 더 낫습니다. 물론 이제 지적인 수준이 낮다는 것보다 글을 더 잘 쓰거나 많이 써본 친구들한테 읽어보라고 하면 보입니다. 그런 얘기를 강조하고자 말씀을 드렸습니다. Outline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내용의 충실도를 점검하고, 구성의 탄탄함을 점검하고, 표현의 적절성과 정확성을 점검하고 심지어 정서법과 편집을 확인하는 것이 글쓰기 이후의 점검하는 전략들이다. 이게 교과서적인 얘기입니다만은 키워드와 키센텐스만 가지고 여러분들한테 칼럼니스트들에게 참고하라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Ⅲ. 글쓰기 첨삭시간


첫 번째 -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장슬기 칼럼니스트

자 이제 첨삭을 하라고 저에게 요구하셨는데. 일단 첫 번째 장슬기 칼럼니스트꺼(제목 - 너의 꿈은 싸이코패스 / 주소 - http://ibd.or.kr/column03/16946) 칼럼을 바라다보는 잣대고 레시피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뭐 제가 그냥 간단히 시간이 많지 않고 이따 술자리에서 얘기 나눌 수도 있으니까 처음 온 학생들은 처음 본 글이기도 합니다만은. 여기 칼럼니스트나 이 글을 많이 본 친구들은 공유할 수 있겠지만 제 소견만 먼저 말씀을 드리고 장슬기 칼럼니스트가 도움을 받기를 기대 합니다. 이럴 때 제가 참 어렵습니다. 4년 동안 가르치는 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얘기하기가 참 편한데 여기는 그래도 손님이라 참 힘든데요.

일단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이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제가 아까 좋은 글의 첫 번째.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는 말. 그런데 그 의미가 잘 안 드러난 부분이 의외로 많아요. 그리고 예를 들어서요. 제가 노골적으로 지적을 하겠습니다. [흑인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한국인에게 흑인 사진 여러 장을 준다. 사진을 잠시 보게 한 뒤에 사진 중에 한 사람이 실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몇 번째 사진이었는지 기억해내는 실험을 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이것들이 흐름이 뭔가 조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호기심 유발이 되는데 그 뒤에 그것을 가지고 이끌어 내는 거. 그러니까 탄탄하게 반죽을 만들어서, 독자들은 아 저걸로 수제비를 만들까 칼국수를 만들까 기다리고 있는데, 생뚱맞게 그거가지고 술을 빚는다고 냉장고 안에 집어넣어버렸어요. 이런 듯한 느낌. 그러니까 여기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지금 이 친구의 주제는 제목에 상기되어 있다고 보여진다면은. 우리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꿈은 싸이코패스가 되어버리고 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모습을 이런 글에다 담고 싶어 한거죠. 그런데 여기 있는 모든 근거들이나 논거들이 소재들이 재료들이 지금 그것을 향해서 앞으로 나란히, 마치 밤에 벌레들이 형광등을 향해서 달려오듯이 쫙 몰려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게 나름대로 벌레 하나는 저쪽으로 날아가 있고 또 하나는 저쪽으로 산만하게 그냥 그 앞에서 날라가고 있어요. 그게 이 글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끌고 와서 많은 벌레들이 지금 그 불빛을 향해서. 특히 젊은이들은 꿈마저 싸이코패스가 되어가고 있다는 이 아픈 현실을 안타깝게 이 글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게 이 글의 주제인데. 그런데 여기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것을 향해 가야 하는데. 뭔가 동원을 했는데 가지 못하고 옆으로 막 흩어지면서 산만하게 움직임만 보이는 거죠. 앞으로나란히가 안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것은 너무 서둘러서 쓴 글이에요. 분명히 이건 너무 서둘러서 쓴 글이에요. 이걸 김장독에 넣어놓고 일주일쯤 묵혔다가 약간 스며들게 해야 하는데 쫓기는 거 같아요. 날짜에 쫓긴 거 같아요. 본인이 인정할겁니다.

그 다음에 첫 번째 단락에 시각이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등장을 합니다. 첫 번째 단락에 네 번째줄 보면은 [이것은 다른 인종을 구분하는데 시각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시각이 나오죠. 그리고 그 다음 줄에 시각이 나오죠. 그리고 이제 그 단락의 마지막에 감각이라는 단어로 살짝 자리바꿈을 합니다. 그 자리바꿈이 두 번째 단락의 감각이라는 단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두 번째 단락 중간쯤 보면 감성이라는 단어로 자리바꿈을 합니다. 시각이 감각이라는 단어로 자리바꿈하고 연결되면서 감성이라는 단어로 옮겨가요. 이건 아주 잘됐어요. 자연스럽게 아주 여러분 중학교 때 점강법, 점층법 그런 비슷한 흐름으로 그 단어를 가지고 그 단락을 혹은 그 문장을 이어가는 이음새 역할을 하는 것은 아주 괜찮게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첫 번째 단락에서 시각이 발달하게 되면, 그것이 익숙해지면 감각이 발달한다. 그리고 감각이 발달하면 가치와 미를 보는 관점도 발달한다.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가잖아요 글이. 그런데 시각 혹은 그 흑인을 구별할 줄 알게 되면, 시각이 발달하면 흑인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 그러면 감각도 발달한다는 것. 그러면 이 글의 더 핵심인 그림을 보는 예술을 보는 가치와 미관도 발달한다는 걸. 이걸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전문적인 용어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는 있죠. 이 사람이 이 필자가 이끌어가는 논리가.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가 어쩌면 더 많아요. 이런 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그래서 논증 양식의 글 혹은 논술의 글에서 가장 문제로 많이 지적되는 게 일반화의 오류에요. 몇 개의 샘플을 자기 주관적으로 이끌어가지고 그것을 일반화라고 설득해버리는. 이것도 오류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을 이끌어 가는데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 중간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다.] 이런 문장도 너무나 조금 억측이죠. 그 다음에 [감성적인 것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근대사회의 이분법이 철칙으로 작용한다.] 약간 이 문장까지 세 문장은 억지를.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아주 미세한 거지만 그 다음 문장. [성적이나 경제력에 의해 우열을 가리는데 익숙할 뿐, 크게 슬프거나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이것도 잘못 쓴 문장이죠. 크게 기뻐하거나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라고 써야죠. 예를 들어 이렇게 미세한 것들은 지금 뭐 저희과 학생들은 제가 슬라이드로 띄워놓고 하나씩 하나씩 분석을 하거든요. 이런 거 하나 가지고 보통 두 시간씩 해요. 근데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몇 가지 힌트처럼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단락 맨 마지막 거 보세요.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어디론가 좀비처럼 달려갈 뿐이다.] 이것도 너무 냉혹하고 단정적이죠. 이 흐름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던 흐름인데. 만약에 지금 들었던 부분을 이렇게 바꿔봅시다. ‘세상은 느낄 필요가 없이 그저 어디론가 좀비처럼 달려가기만을 강요할 뿐이다.’ 제가 생각나는 대로 그냥 바꿔봤어요.

그 다음 단락은 제가 아까 칭찬 쪽으로 얘기했듯이 시각이라는 단어로 그 다음에 감각이라는 단어로 그 다음 감성이라는 단어로. 지금 세 번째 단락은 첫 문장이 21세기 대한민국은 감성이 바닥난 사회다. 감성이라는 단어로 연결을 해가고 있잖아요? 이런 건 아주 잘했어요. 어, 이런 단어를 가지고 이음새를 연결해 가는 것이 글이 딱딱할 수가 있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아요. 비록 단어를 가지고 연결하는 이음새 역할을 해 가면서도 굉장히 그것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 마치 점층법처럼, 점강법처럼. 그런 부분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특히, 이 글의 세 번째 단락 [ 21세기 대한민국은 감성이 바닥난 사회다. (중략) 국민들은 자연히 감성을 증폭해볼 기회가 없다.] 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이 세 번째 단락은 아주 잘 썼어요. 그래서 이 세 번째 단락의 문체를 첫 번째 단락 두 번째 단락도 조금 그런 식으로 문체를. 조금 단정적인 게 아니고 약간 문장도 세 번째 단락은 조금 길거든요. 첫 번째 두 번째 단락은 문장이 너무 짧아요 단문, 너무 단정적으로. 이런 건 칼럼으로는적절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젊은이들의 칼럼에서는. 그래서 이 칼럼을 쓰신 분은 세 번째 단락의 느낌을 칼럼 쓸 때마다 그 느낌을 자꾸 상기시켜가지고 그 정서에 젖어서 쓰시면은 확실히 좋을 거 같아요. 그런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다음 페이지에 있는 네 번째 단락. 거기 중간 밑에 보시면 [다양한 감성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의 불구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 다음에 삼포시대 라고 한다는 문장이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너무나 스킵한거 같아요. 껑충 뛰어 버렸어요. 그 앞에 이음새로 몇 개의 문장을 이어줘야지 부드럽게 진행이 되는데, 갑자기 걸음마 하다가 껑충 뛰어버린듯한. 지금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가끔 보면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은 중간에 이음 문장을 두 문장 정도, 한 문장이라도 좋아요. 그 스킵은 그 단락 맨 마지막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싸이코패스라는 그 개념이나 인식들이 너무나 스킵 했어요. 그렇죠? 우리는 그들은 우리를 싸이코패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뭐 이정도로 완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도 좀 염려가 되었고요.

그리고 그 다음단락이요 필자에게 도움을 좀 드리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이런 경우는 좀 그런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니까. 그런데 제가 제발 부탁인데요 다른 칼럼니스트들 너만 알고 있는 것은 절대로 쓰지 마십쇼. 그리고 반대로 너무 상투적인 거 다음 칼럼니스트한테 제가 얘기할 텐데,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이런 정도의 지나친 상투적인 거 이런 거도 절대로 써서는 안 돼요. 그런데 이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친구는 갑자기 다음단락으로 넘어가는데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현재가 억압적이어서 미래가 어두운 사람들은 하고 툭 튀어 나오는데. 부르디외가 나오는 대목이 너무나 지루하게 많이 나오고 있으며, 완전히 번역 투에요. 자연스럽지 않아요 문장이. 다른 문장에 비해서. 이거 어디에 번역되어 있는 거 따오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긴 한데. 자기 말로 바꾸세요. 이거 무슨 논문 쓰면서 인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문장을 조금 부드럽게. 비문장이 아닌 앞의 세 번째 단락처럼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거 같고. 그리고 이 단락은 첫 번째 문장을 피에르 부르디외로 시작하지 말고, [현재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충분히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건설적인 미래를 꿈꾼다.]로 시작하세요. 이 네 번째 단락은 그게 첫 문장이에요.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이어서 하면 되요. 그게 소주제문이고 그 단락은 그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그게 훨씬 더 자연스럽고 단락나누기에도 적절합니다. 그 다음에 역시 마찬가지로 부르디외하고 연결된 부분은 문장이 국어선생인 내 입장에서 보면 다 비문장이에요. 의미는 들어와요 다 들어오는데 문법적으로 다 틀리다는 얘기죠. 이것은 아까 얘기 드린 것처럼 번역된 내용을 따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 같은데 자기 식으로 바꾸세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뭐 이거 논문도 아닌데, 괜찮아요. 얼마든지 그렇게 쓰세요.

그 다음에도 약간 스킵된 부분이 있는데 다음단락. [감성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거기서부터 CEO 얘기 나오는. 그 중간쯤입니다.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이 익숙하다.] 그 다음에 너무 스킵 했어요. [느껴지지 않으면 분노하지 않는다.] 이것도 너무 껑충 뛰었어요. 생뚱맞아져요. 그 다음에 [우리의 꿈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를 닮아가고 그들을 흉내 내서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도 계속 스킵해요. 그리고 이것을 왜 다 과거형으로 써야만 했는지. 과거형으로 쓰지 마세요. 과거형으로 쓸 이유가 전혀 없는데. 여러분들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할 때도 그러잖아요. 불변의 진리는 영원히 현재형. 그렇죠?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과거형. 이건 역사적 사실도 아니에요. 그냥 현재형으로 쓰는 거죠.

그 다음에 소위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단락인데. 여러분 결말은요, 모든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게 결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학생들한테 물론 저희과 학생들 지방학생이라서 열등감도 많은 친구들이 대부분입니다만은. 설명을 가능하면 재밌게 하려고 애를 써요. 이런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연애하는 것을 생각해봐라. 너 여자 친구하고 만났단 말이요. 그럼 만나서 하는 첫인사, 오늘 쟤가 뭐 입고 왔나. 그게 서론이에요. 그럼 탁 오늘 즐겁게 보내야 겠다는 느낌을 갖는 첫인상은 0.1초에 결정됩니다. 그게 서론의 역할이에요. 아, 이거 읽어봐야지. 유인책이죠. 그리고 결말. 데이트 하면서 마지막에 헤어지기 직전에 그 1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걸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게 결말이에요. 이 글을 이 필자의 느낌과 내용이 이것과 연관성 있는 TV를 볼 때 연관성 있는 신문사설을 볼 때 이 친구가 떠오를 만큼 마지막 인상을 강하게 남겨줘야 하거든요. 그게 결말이에요. 근데 여기는 이걸 잘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그냥 똑같은 얘기 계속 진행하면서 끝나 버린 듯한. 그런 생각. 진실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 주제의 강렬함. 마지막 인상. 이걸 결말에 때려줘야 한다는 거죠. 중언부언 앞의 얘기 계속하지 말고 요약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 그리고 주제의 강렬함, 마지막 인상. 이걸 결말에 담아줘야해요. 그리고 결말은 가능한 짧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장슬기 칼럼니스트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말씀을 드리고. 덧붙이고 싶은 말은 제목이 적절치 않아요. 싸이코패스를 권하는 사회 이렇게 한다든지. 만약에 이런 제목을 붙인다면은 아마 싸이코패스 뒤에다가 물음표 정도는 찍어줘야 하지 않을까. 제목 자체에도. 마치 싸이코패스를 권하는 게 긍정적인 사회다라는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제목이거든요. 싸이코패스를 권하는 사회 이 정도가 저는 더 마음에 드는데 왜냐면 이게 칼럼이니까, 약간 사설느낌도 가져야 되기 때문에 제목이 가지고 있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쓰는 것은 금물이죠.


두 번째 -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김관회 칼럼니스트

그리고 다음 김관회 칼럼니스트 것을 보겠습니다.(제목 - 유능한 야당이 되어야 / 주소 - http://ibd.or.kr/column03/17141) 김관회씨 것은 너무 내용이 쉽게 들어와요. 그래 어어 맞아 맞아. 독자가. 그래 어어어 그렇지. 그러면 그 얘기는 절대로 좋은 얘기가 아닙니다. 칼럼이나 사설에서는 그게 절대로 칭찬이 아닙니다. 네가 하고 싶은 얘기는 뭔데? 이게 있어야죠. 그래 유능한 야당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그래 근데, 그 question에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뭐야? 어 맞아 이야 니 얘기 들어보니까 맞아. 매일 똑같이 하는 야당이 이래야 한다는 얘기하고는 정말로 니 얘기가 좀 다르다. 정말 야당이 그거 명심해야 되겠는데? 이거 있어야죠. 근데 그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렇죠? 전체적으로 너무 상투적이고 너무 평이 하여셔, 앞에서 제가 잠깐 언급했던 패러다임 쉬프트. 참신성과 개성이 없어요 이 글은.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평이합니다. 그래서 신선한 감동이나 신선한 공감을 얻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야당을 향해 던지는 글이라면은 야당의 누구도 내가 이런걸 생각 못했구나. 이게 있어야 하거든요? 그게 글의 생명이니까. 근데 그런 키워드나 키 아이디어가 제가 볼 때는 없어요.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얘기죠. 그런 것이 아쉽습니다. 특히 여기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이런 표현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지나치게 상투적인 비유들 이런 것들은 가능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장도 역시 앞에서 지적한 거처럼 물론 전문가들은 칼럼니스트긴 하지만 글의 전문가들은 아니시니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저도 갖습니다. 그렇지만 뭐 저한테 첨삭을 해달라고 하면 문화센터에 와 있는 것도 아니고. 문화센터에 와 있으면 아이고 이 여사 글 너무 잘 썼어, 이 사장 글 너무 멋져(웃음). 저도 문화센터 강연 몇 년 해 봤습니다마는, 김 여사님 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런 짓도 해봤는데(웃음). 하지만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희과 학생 다루듯이 꾸지람도 하는 겁니다. 기분 언짢으시면 다시는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시고(웃음). 어떻든 김관회씨한테도 그런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말도 사용하고 있어요.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좋아하겠지만 이건 글이기 때문에 이건 다람쥐 쳇바퀴 돌 듯과 같은 상투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김관회씨한테 특히 제가 이거 나쁜 버릇인거 같아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밑에 보면 [2008년 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그 다음 단락. 물론 이는 프레임 상으로는. 물론 나오죠. 그 다음단락에 비교하자면, 나오죠. 그 다음에 보면은 물론, 물론. 세상에 단락을 새로 시작하는데 습관처럼 물론이 나오는 거 이거 아주 안 좋습니다. 이거 아주 나쁜 버릇인거 같아요. 심지어 문장을 사용할 때도 습관처럼 꼭 시작할 때 비슷한 단어로 그러나, 그렇지만, 그런데 뭐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버릇이에요. 본인이 잘 자각을 못합니다. 이건 지적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까 제가 영어로 되어 있는 호주에서 본 책들 중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이런 게 있어요. sentence opener. 시작하는, 문장을 시작하는. 그런 단어가 실제로 있어요. 일상적으로 사용해요. sentence opener의 복수 sentence openers. 그것이 신선하고 새롭고 참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요. 문장을 새로 시작할 때 마다. paragraph opener도 항상 써요. 새롭고 신선하고 액티브한 그런 걸로 시작을 해라. 그런데 이 친구는 계속 물론, 물론. 다음단락을 시작하겠습니다가 싸인으로 물론이야. 이러면 안 돼요. paragraph opener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도 나쁜 버릇이 될까봐 지적을 합니다.

그리고 문장도 역시 마찬가지로 비문이 많이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서 [물론 이는 ‘프레임’상으로는 너무나도 편하다. 집권여당과 정부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에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입장에 위치해 이런 건 당연히 틀린 문장이고요. [그래서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런 것도 사실은 비문이에요. 그 다음에 밑에 문장에 [그러다보니 ‘야당’은 정책과 비전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대중들의 인식 속에 ‘야당’은 수권정당으로서] 야당이 수권정당은 아니죠. 이런 것은 용어 선택을 잘못한 것으로 보이고요. 수권정당은 당연히 여당이죠. 그 다음에 역시 마지막 문장도 잘못 쓴 문장이죠. [실생활에서 무언가를 더 나은지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 다음에 역시 마찬가지로 가장 아쉬운 건 크게 아까 장슬기씨 칼럼 때도 얘기 했지만 역시 결론이에요. 제가 두 분의 칼럼을 6번쯤 읽었는데 그것도 연구실에서 아무도 학생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 읽었어요 일부러. 요즘 학생들이 자주 오거든요. 제 눈 여러 번 보면 성적 올려줄까봐(웃음). 여러분 학창시절도 생각 날거에요. 아무튼 그래서 문 잠가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없는 척 하고 읽었는데. 가장 아쉬운 것은 결말이에요. 맨 뒤 단락이 제일 아쉬워요. 한 대를 꽝 쳐줘야하는데, 그리고 두고두고 시간이 지나도 그게 남아야 하는데. 안 남아요. 그러니까 결말의 강렬함이 부족한거죠. 그리고 마지막 인상을 남긴다는 건데 결말이. 그것이 이 친구도 조금 부족한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점을 조금 염려해 봅니다.

그리고 주제 문제인데. 결국은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칼럼을 쓰는 것이거든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거에요. 근데 주제를 그 글 전체에서 한 번씩 때려줘야 하거든요. 주제를 그냥 예를 들어서 ‘나 너 사랑해’, ‘나 너 사랑해’, ‘나 너 사랑해’, 이런 식으로 백번 한다고 얘가 정말 사랑의 깊이를 알까요? 아니잖아요. 적절한 순간에 탁 한번 정말 좋아하거든? 가장 적절한 순간에 ‘너 정말 보고 싶었다?’ 가장 적절한 순간에 탁 해줘야지 이 친구가 평생 못 벗어나죠(웃음). 그게 바로 주제의 적절한 장소에요. 그게 바로 있어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글쓰기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논술 1주일 최종특강 하듯이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면 이런 거예요. 어차피 글이라고 하는 것은 세부적으로 얘기하면 3단구성도 있고 4단구성도 있고 5단구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글은, 여러분들이 쓰는 논설 같은 거나 칼럼이나 사설 같은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의 생각을 펼치는 글은 거의 다 3단구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서론-본론-결론으로 되어 있고. 본론은 좀 길수도 있고. 그런데 서론의 맨 마지막에 한번 때려주라는 거예요. 서론은 맨 마지막에 어떤 식으로든 한번 때려줘야 되요. 그 다음에 본론. 본론을 영어로는 Body라고 합니다. 본론의 시작하는 부분, 그리고 본론의 끝 부분. 거기다가 반드시 또 때려줘야 해요. 꼭 내가 하고 싶은 주제를 반드시 쳐 줘야 해요 강하게. 그리고 결론의 첫 부분 결론이 시작하는 부분 거기서 가장 강렬하게 때려줘야 되요. 아껴뒀던거. 결론의 첫 문장에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에 때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이게 마치 최종 입시 과외 하는 느낌인데. 그 요령을 나중에는 이걸 얼마든지 자신의 개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아직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죄송합니다. 꾸지람만 해서. 나는 비평가고 비평가는 영어로 critic이고 critic은 judgement 때려주는 놈이에요.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가서. 고맙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십쇼. 자연스럽게.


질의응답


Q. 좋은 지적 해주셔서 감사했고요. 제가 이걸 쓴 취지는 야당이 지지부진한 것도 있고 저도 쓰면서 비문이나 접두어를 많이 쓰는 방식으로 쓰다보니까 그걸 퇴고과정에서는 적절하게 바꾸거나 고쳤어야 하는데 그게 좀 안되서 그렇게 된 거 같고요.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할 때 유의해야 할 게 제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들어가야 되는데 제가 글 쓸 때 그런 부분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서요. 그런걸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A. 그러니까 글이 설득력을 가지려면요.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면은 결국 주장이 아니라 에비던스에요. 논거. 논술에서는 에비던스를 논거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거든요. 에비던스는 두 가지가 있어요. 권위적인 논거가 있고 사실적인 논거가 있어요. 데이터 같은 것은 다 사실논거죠. 그 다음 권위적인 논거는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어떤 권위에 의존하는 논거. 그 두 가지가 뒷받침이 되는 겁니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뭐 안경낀 여자가 더 멋있대. 따라서 안경 낀 여자가 멋있어. 이게 웃기는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권위, 그 사실의 근거가 필요하죠. 요즘은 얼마나 편합니까. 인터넷 손가락으로 장난만 치면 되는데. 그 얼마든지 그 논거들을 찾아낼 수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그 말씀하신 분의 글도 저는 그런 질문은 얼마든지 극복해서 쉽게 지금 얘기한 것들을 참고해도 도움이 될 수 있고요. 나는 이제 왜 이런 말을 질문 했으니까 답변 겸해서 말씀드리면은. 전혀 젊은이다운 글이 아니다. 왜 이렇게 용기가 없을까. 이 단체가 대충 어떻다는 것은 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고, 여기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그때부터 제가 사이트도 거의 다 읽어봤고.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이트의 관리가 사이트의 내용이 아니라 관리에 마음이 안 드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이 다 같이 관리해야 할 텐데. 그래서 그 꾸지람도 하고 싶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시면은 청년 칼럼이니까 과감하게 좀 쓰셨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뭐 여당 조금 우스운 얘기지만은 여당을 설득시키고 여당을 굴복시키는 야당이 되어야 한다. 쟤네들은 안 되잖아요. 앞에 있는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당연하죠. 그 다음에 거꾸로 여당도 마찬가지죠. 어찌 보면 여의도가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가장 숨 쉬고 있는 바다죠. 근데 인문학은 인간의 가장 소외, 아픔을 쓰다듬어 주어야 하는데. 소위 민생인데. 쟤네들이 얘기하는. 근데 보세요 우리가 가장 아픈 곳이죠. 인문학을 가장 비인문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에요. 그런 식으로 써보세요 지금 내가 얘기하는 대로. 그게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요. 근데 그런 거 전혀 없고 조심스럽게 어디 잡혀갈까봐(웃음). 요즘 어디 잡혀가지 않아요. 제가 옛날 대학 강사 처음 시작할 때 그 때인데. 강의실에서 뭐 이렇게 몇 마디 했더니 퇴근을 하는데 모교인 서강대 앞에서 이상한 아저씨들이 뒤에서 턱 와서 잠깐봐. 지금도 다방이 기억나요 왕자다방이라고. 거기 가서 이 XX말이야. 교수 해먹고 싶어? 그게 첫마디에요. 제가 두 시간 세 시간 강의했던 게 쫙 요지파악이 되어있어요. 그 강의실에 와서 앉아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혼났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웃음). 근데 그때 이랬던 사람들 저기(국회) 많이 들어가 있어요. 나쁘게 얘기하면 변절자죠. 저기 들어가려고 한거에요. 대표적인 사람들 80년대 학번도 많잖아요. 전 70년대 학번이었습니다. 혹시 여기도 그렇다면은 저는 오늘을 가장 부끄럽게 생각할겁니다. 또 질문 하십쇼.

Q. 저는 들으면서 교수님 스마트폰 쓰시는지 묻고 싶었어요.

A. 전 안 써요. 쓸 줄도 모르고 물론 배우면 쓸 수는 있겠죠. 저 한 달에 11,000원짜리 이거(옛날 핸드폰)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웃음)

Q. 요즘 사람들은 카톡을 전화보다 더 편하게 느끼잖아요.

A. 물론이에요. 근데 저는 1번은 솔직하게 고백하면 모르고 못하니까요 일단. 그리고 저는 인터넷 볼 이유가 없어요. 다니면서 봐야할 내용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연구실에 컴퓨터 있죠. 제 방에 컴퓨터 있죠. 잠깐 가는 사이에 이걸 봐야 되나. 난 다른 거 생각하고 싶은데.

Q. 그리고 카톡이나 이런 것이 서로 주고받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 인문학을 들으면서 감각하고 느끼는 거 이런 것은 저한테 충분히 전달이 되었는데. 왜 그게 솔직함이랑 연결되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인문학이 왜 솔직해야 되는지. 솔직해야 한다, 솔직함이 인문학의 시작이다. 솔직해지는 게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지 잘 이해가 안됐어요.

A. 조금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요. 바닥에 꽃이 있는 곳에는(?) 인문학이 들어갈 자리가 별로 없어요. 벌거벗은 곳에 확실히 더 많은 인문학이 넘칠 거라는 확신은 있어요. 왜? 인간은 처음부터 벌거벗고 산 존재에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있는 인간의 모습이죠. 바실라르가, 죄송합니다 제 전공 얘기해서. 바실라르가 예술학, 물론 철학자지만 예술학, 문학에 대한 책도 많이 썼어요. 제목에 촛불의 미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소위 철학책이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이 필독으로 봐야할 책이에요. 학생들에게 그 책 보라고 하면 갑자기 왜 촛불 얘기 하세요? 이러는데. 거기에 보면 예술 혹은 인문학의 지향점이 뭐냐. 그걸 비유적으로 표현해서 프랑스 사람인데 the home, the house, the mother. 어머니요, 고향이요, 집이다. 그게 인문학의 모태라고 할까요.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표점이에요. 어머니요, 고향이요, 집이다. 진짜 나를 낳아준 어머니 그게 아니에요. the가 붙었으니까. home 앞에 the를 붙이면 안 되는데 거기엔 붙어있어요. 고향이죠. 출신어디야 이런 개념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우리 인간이 출발한 모태죠. 어머니 자궁이죠. 그때 어머니는 날 낳아준 개념의 어머니가 아니고. 그게 인문학의 수원지에요. 그래서 순수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Q. 구체적으로옷을 벗고 만나고 사우나를 하면서 만날 수 있다 그런 얘기는 아니잖아요.

A. 물론 그런 얘기는 아니에요. 하하.

Q. 그럼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인문학적으로 가장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뭘까요. 대화?

A. 소통이죠. 아까 제가 처음에 모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왜 여기 와서 앉아 계십니까? 그러면 얘기들을 할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얘가 오라고 해서(웃음). 여기 뭐 팀장이 눈치 줘서. 뭐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런데 대개는 그렇게 또 얘기 안하잖아요. 그렇게 얘기안하는 그건 또 인문학에서 좀 떨어져 있는 거죠. 결국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과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못할 얘기 들이 많죠. 다음 달부터 내 연구실 들어올 때 나빠질 가능성이 있으니까(웃음). 조금 오답을 해서 죄송합니다만은.

Q. 저는 제 푸념을 좀 하고 싶은데, 뭔가 제 생각에 요즘 사람들 만나도 그렇고 뭔가 엄청나게 큰 문이 있는데, 도저히 열리지 않는 문이 있는데 그걸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는 거 같고, 그게 잘 열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 이렇게 인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겠다. 아니면 우리가 조금 더 사람답게 살아야 겠다 얘기를 해도, 뭔가 딱 현실을 보면 과제가 너무 많고 나는 계속 이겨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이렇게 단정을 하는데. 인문학이 요즘 딱 두 가지 인거 같아요 제가 요즘 봤을 때는. 그 인문학 얘기를 하면은 인문학 얘기를 하는 분들은 대개 가난해요. 뭔가 인문학을 하는 학회는 제가 사회과학을 하지만 사회과학을 하는 학회에 비해서는 좀 규모나 이런 것도 좀 작고 가난해요. 근데 반대로 인문학을 좀 느끼는 사람들은 좀 배부른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런 괴리가 왜 생기는 건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너의 꿈은 사이코패스’ 이런 글을 통해서 본 것처럼 과연 우리가 팍팍한 현실에서 어떻게 인문학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지를 연사님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저도 솔직히 요즘은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공부를 계속했는데, 막상 이렇게 오다보니까 그렇게 못살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A. 제 아이에게 맘대로 해라. 단, 내가 국문과 교수인데 국문학만은 하지 마라(웃음). 이 말에 모든 답이 포함되어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인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가난하죠. 그리고 인문학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은 더 가난하죠.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게 그런 거 같아요. 저는 그래도 교수라도 하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봉급이라도 주니까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거, 내 안식구가 힘들게 살아가는 거, 내가 열 몇 평짜리전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 나는 참을 수 있는데 내 자식에게 그 아픔을 대물림하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어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죠. 내 아이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어디 놀이공원 가서 놀았다, 뭐 컴퓨터 스마트폰 새걸로 바꿨다고 그러는데. 내 아이는 아직도, 386 쓰고 있다든지. 아직도 이웃집에서 얻어서 쓰고 있다든지. 한번 그거 생각해보세요. 너무너무 힘든 겁니다. 정의, 자유,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 과연 그것을 어디까지 인내하고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저도 여러분들 앞에서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신이 없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 앞에서 저는 요구는 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먹고 살만하지 않나요. 그러면 우리 때보다는 좀 더 줏대 있게 지켜나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요구는 하고 싶어요. 그 정도로 제 답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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