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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특별강연 - 2013.07.16

더연 / 자료실 / 2013.07.19 121.131.233.140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특강

-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특강. 2013년 7월 16일 -



7월 16일 더연 역사특강이 노무현재단 강의실에서 열렸습니다. 강연은 임시정부 상임고문을 맡으셨던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님의 손자이신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김자동 회장님은 1928년 상해임시정부 인근에서 태어나 김구, 이동녕, 이시영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자란 분입니다. 독립운동가와 임정의 활동을 보고 자라면서 청년기를 보내고 언론계에 종사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사형되는 것을 보며 언론계를 떠났습니다. 이후 민주화운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80년대에 번역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모택동전기’와 같은 번역서로 표출 하였고, 87년 6월 항쟁으로 새롭게 탄생한 헌법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전문에 실리면서 임시정부의 의의를 교육하고 사료를 발굴하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역대정부의 무성의를 극복하고 민간의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2004년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근현대사가 바로 ‘살아온 삶 자체’ 인 회장님의 강연은 그만큼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증언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래 전문에서 녹음품질 문제로 인해 글로 옮길 수 없는 부분은 부득이하게 ‘....’ 표시를 했습니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며 첨부한 강연자료와 칼럼을 꼭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특강>


 


 

 

삶 자체가 근현대사

 

‘해방에서 6.25전쟁까지의 국내 정세’ 라는 제목으로 (강연)준비를 했어요. 사실 난 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에요. 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결국은 내가 살아온 것이 근현대사이고, 가족들이 깊이 그 속에 있었고, 내가 언론계에 있으면서 주로 국제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상식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니까 역사 공부를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를 한다 생각할 수도 있을거에요.

 

 

1945년 - 분단의 역사, 통일이 불투명한 역사의 기원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몇 십 년 동안 쪼개져있고 통일의 희망이 크게 안 보이는 것은 사실 1945년에 일어난 몇 가지 역사적 사건 때문이 아닌가. 우선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얘기를 하겠어요.

 

 

얄타회담, 신탁통치가 처음 논의되다

 

1945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는 해였어요. 유럽에서는 이미 전세가, 독일이 유럽 전역을 거의 점령했어요. 러시아의 반 가까이, 그리고 중립국인 스웨덴, 스위스, 핀란드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점령했고. 해협 때문에 건너지를 못해서 영국은 공격하는데 실패한 상태였고 러시아도 반 가까이 점령을 했지만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에서 연거푸 패전을 거듭하면서 쫓겨나기 시작해서 45년 1월엔 이미 전쟁이 독일 본토에서 진행되기 시작했던 거예요. 실제로 5월 8일 날 전쟁이 끝났으니까 불과 끝나기 4개월 남은 상태였죠. 그러면서 아시아에서는 그때까지도 더 싸워야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45년 6월인데, 그해 2월 초에 러시아 남쪽의 지금의 우크라이나 얄타라는 휴양지에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벨트와 처칠과 스탈린의 얄타회담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신탁통치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얄타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전후 유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좋지 않게 얘기하면 어떻게 나눠먹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의논을 한 것이고, 하나는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소련의 참전을 의제로 가지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비밀 회담으로 진행했어요. 물론 후에 대부분 밝혀졌지만 그 밝혀진 때가 아마 1957년일 거예요.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집권당이 과거정부에서 한 정상회담의 비밀을.. 원래 비밀 회담이 아니더라도 국제상례로 30년간은 발표를 안 하게 되어있어요. 그걸 갖다가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영해, 영토를 이북에다가 넘겨주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얄타회담 문서는 30년만이 아니고 12년 만에 비밀문서가 해제가 되었어요. 해제를 미국 정부에서 한 게 아니에요. 국무부에서 가지고 있는 비밀문서를 뉴욕타임스에서 입수했어요. 입수를 해서 자기들이 검토를 해보니까 현재 발표해도 국제문제로 비화될게 없고, 회의 당사자들도 죽은 사람은 죽고, 산사람도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을 것이 없다. 그래서 발표를 했다.

 

루즈벨트의 생각은 무엇보다 중요한 게 소련을 일본과의 싸움에 참여시켜야 되겠다. 왜냐하면 1944년 말에 미국이 태평양 대부분을 다시 찾았어요. 한때 일본이 하와이 등 태평양 전역을 다 지배했었는데 대부분 밀려나고 마지막 전투가 44년 11월인가 12월에 있었는데 사이판 섬에서. 그때 미국 사람들이 치를 떨게 되었어요. 일본군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데 일본 본토에 상륙하게 되면 대체 얼마나 죽여야 하는가. 그래서 꼭 소련군을 끌어들여야 되겠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관동군은 막강하다고 알려져 있었어요. 그 관동군이 소련의 국경, 만주 쪽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흥정할거다, 뭔가 더 달라고 할 거다. 여러 가지 양보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스탈린이 독일과 싸우느라고 힘든데 일본과도 싸운다는 것 참 힘이 든다. 소련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달라는 암시를 한거에요 스탈린도. 그 자리에서 요구한건 딱 한가지에요. 일-러 전쟁이후에 일본에게 뺏긴 걸 다 돌려 달라. 사할린, 쿠릴열도 이걸 돌려 달라. 당연한 요구라고 보여졌고. 만주에서는 중동철도의 관리권을 달라. 중동철도는 제정러시아가 만든거에요. 시베리아에서 오다가 돌아서 하바로프스크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오는데 블라디보스톡 항을 중부 시베리아 까지 연결하기 위해서 만주를 횡단하는 열차를 만들었는데 이게 중동철도에요. 그때 청나라가 약하니까 러시아가 가설하고 관리권을 달라고 해서 러시아에게 줬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간섭군(軍)을 파견했어요.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이제 또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폴란드 체코, 이런 나라들에.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파병을 했어요. 지금의 연해주 일대를 점령했어요. 그리고 만주에 있는 소련의 이권을 전부 빼앗았어요. 그리고 1905년 이전에 러시아가 요동반도 끝에 있는 여순항, 중국발음으로는 뤼순 항을 조차(租借)했었는데, 1905년에 패전하면서 그것도 일본에게 넘어간거에요. 중국에 있는 이권으로써 뤼순 항을 러시아의 뒤를 이은 소련이 조차권을 가져야 되고, 중동철도 관리권을 달라. 미국에서 사실 중국의 승인을 받아내야 하는 건데 좋다, 그렇게 합시다. 그 대신 우리나라에 관한 이권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는 스탈린이 뭘 가지고 있었을 텐데 한 건도 요구한 것이 없어요.

 

 

이승만, 미 국무장관 특별보좌관에게 쫓겨나다

 

그전에 1942년 초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주미대표부로 있으면서 미 국무성을 그때까지 한 번도 드나든 적이 없어요. 42년 1월까지. 그러니까 42년 11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선전포고를 하니까 그제서 이제 국무성을 한번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때도 돈 때문에 간 거예요. 2차 세계대전때 영국에 대한 차관과 금전지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중립국인 미국이 영국을 지원하려면 거저 줄수는 없다. 왜냐하면 참전국이 아니니까. 그래서 영국에서 처음에는 현금을 사가고, 현금이 모자라니까 외상으로 사가고, 외상으로 살적에는 영국 측에서 지급보증을 해주는데 상식적으로 그걸 계속 받아줄수가 없게 되니까 미국.... 영국에 망명해 있는 폴란드인, 네덜란드인, 재중 프랑스 이런 망명정부에 대해서도 돈을 빌려준거에요. 중국에 임시정부가 있으니까 자신이(이승만) 임시정부의 주미대표로 있으니까 임시정부에 돈 좀 꿔달라고 찾아간거에요. 미 국무성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사전지식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고 상하이에 있는 한국인 단체에 대해 대관을 해줄 수가 없다 얘기를 하니까. 그때 이승만이 만난 사람이 당시 미 국무장관의 특별 보좌관 R. J. 씨세(?) 였어요. 국무성에서 소련에 대해서 가장 우호적인 사람 중에 한명이에요. 소련의 앞잡이는 아니지만 우호적인 사람인데.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 매카시의 전쟁시대에 빨갱이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십년간 그런 일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미국에서는 사실 짧은 기간이에요. 5~6년 동안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릴 적에 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처벌하고 했는데 R. J. 씨세(?)를 빨갱이다. 이 사람은 소련에 대해서 우호적이지만 미국 국무성 관료로서 직무에 배반한 일도 없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R. J. 씨세(?)가 국무성의 비밀문서를 소련 대사관에 넘겨줬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런데 매카시가 증인을 내세워요 그 증인이 R. J. 씨세(?)가 문서를 넘겨줬다. 그래서 R. J. 씨세(?)가 부인했어요. 그런데 처벌이 이상해요. R. J. 씨세(?)를 처벌하려면 비밀문서를 타국에 넘겨줬다는 것을 이유로 처벌해야하는데 증거가 안 나오니 문서를 넘겨줬다고 증언하는 증인이 나와요. 상원 조사국에서 부인을 한 R. J. 씨세(?)와 증인의 말이 배척(다르다)된다는 이유로 R. J. 씨세(?)를 위증죄로 처벌해서 3년인가 징역을 살아요. 어쨌든 R. J. 씨세(?)는 소련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이승만 박사는 그것도 모르고 소련이 한국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 부동항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임시정부를 너희가 도와줘야 한다. R. J. 씨세(?)가 듣다듣다 나가라고 했는데, 나가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Get out’ 인데 점잖은 사람은 말하는 방식이 따로 있어요. 뭐라고 했냐하면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우리 주요.... 에 대한 당신 같은 비난을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소’. 나가라는 얘기에요. 근데 이승만이 영어를 잘하니까 알아듣고 나갔어요. 그리고 나서 그 후에도 국무성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2차 대전 후에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여권문제로 한번 들어갔을 거예요. 그런 사람을 임시정부에서 그래도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 박사고 오랫동안 있었으니 잘 통할 것이다 해서 원하는 대로 미주대표부 위원장으로 있게 되었는데. 임시정부는 1942년 이후에.... 같은 가입안했던 단체들 까지도 다 설득을 해서 다 포섭한 좌우합작정부가 수립이 되어 있었는데 재미대표부에서는 재미한국연합회라는게 있어요. 그 당시 한국 사람의 80%가 가입되어 있었어요. 그런 단체의 대표자가 찾아가서 우리도 협조할 테니까 주미대표.... 참가 하겠다 하는 것을 이승만이 다 거절했어요. 윤병직이 같은 똘마니 놈들 데리고....

 

 

한국의 사정을 잘 몰랐던 루즈벨트

 

그때도 소련이 그런 야망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상 소련은 적어도 그런 야망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면 색안경을 쓴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자료) 4페이지와 5페이지에 우리나라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과 남쪽에 진입한 미군이 우리 국민들에 대한 포고문이 나와 있어요. 이 포고문을 보면 소련군은 내용이 해방군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에요. 속에는 무슨 야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만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맥아더의 포고령 제 1호를 보면 고압적이에요. 점령군의 색채를 띠고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 1943년인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미국, 영국, 장제스가 약속을 했고, 독립시키려 했고 점령하려 안했어요. 근데 우리나라 문제가 이렇게 잘못된 여러 가지 중에 하나가 루스벨트가 우리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아시아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켜야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미국 점령하인 필리핀도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었는데 루즈벨트가 45년 4월에 죽은 다음에 거기에 취임한 트루먼 대통령은 국제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무식한 사람입니다. ....지역에 선출된 검사 이런걸 거쳐서 상원에 진출했고 상원에서도 조사활동을 통해서 2차 대전 때 강력한 지도자적 위치에 오르게 되어 부통령을 거치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마도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정책에 대해서 소련에 대해 너무 관용주의다 라는 불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국제문제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요. 더군다나 2차 대전 이후의 아시아 문제에 대해선 더 아는 게 없으니까. 맥아더는 agreed field(?) 통보를 했고(당시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 일본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 아시아 문제는 그 사람말을 들으면 되겠다, 특히나 한국은 부수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대한 정책은 대부분 맥아더가 좌우하지 않았나.

 

 

이승만의 귀국과정

 

내가 번역한 책 중에 80년대 때 학생운동을 한 사람들은 많이 읽어봤을 텐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 읽어봤어요? 번역한 책 중에 가장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 책에 보면 참 재미있는 부분이 나와요. 이승만이 한국엘 가겠다 하니까 미 국무성에서 막아요. 여권을 신청하는데 안해줄수도 없고. 우린 흔히 이승만을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미 국무성에서 이승만의 ID(?)를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어요. 왜 그랬는가는 조금 있다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그래서 여권을 안내줄려고 했는데 이승만하고 아주 친했던 미국 사람으로 당시 상당히 ....했던 굿펠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책에 내용이 나와요. 굿펠러가 그때 CIA의 전신이었던 OSS 부책임자인데 아주 보수적인 지방신문의 사장으로 있다가 전쟁 때 OSS의 일을 맡아 했는데 그 사람이 이승만을 ....하면서 ....부탁을 했대요.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차장 정도 되면 자기가 아는 몇 군데 전화 한통으로 ....될 텐데 미국에서는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야 자기 부서 관할이 아니니까. .... 만드는데 여권이 목적지를, 지금은 미국에 목적지가 없어요. 필리핀까지의 목적지로 해서 여권을 내 줬어요. 그런데 굿펠러가 이승만을 갖다가 맥아더에게 소개를 했어요. 서신으로. 둘이 전보를 .... 주고받다 보니까 마음이 딱 들어맞는거에요 서로. 그래서 맥아더에게 이승만 가는데 협조를 해달라고 굿펠러가 연락을 하니까 맥아더 사령부에서 호놀룰루로 전용기를 보내가지고 여권 없이 그냥 일본으로 온 거에요. 그리고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를 불러다가 만나가지고 미 국무성에서는 그때까지 미소협력에 의해서 전후문제를 해결하려는 루스벨트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맥아더는 미소협력의 틀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 이승만하고 .... 하지하고 .... 만나서 .... 실제로 하지는 도쿄에서 이승만 만났다는 얘기를 일체 비밀에 부치고 마치 처음만난 것 같이 ....

 

 

미 국무성에서 이승만을 불신하게 된 이유

 

왜 미국 국무성에서 이승만을 불신하게 되었냐. 45년 6월에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가 있었어요. 그게 유엔 창립회의에요. 그런데 유엔 창립에 대한 결정은 2월 달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3국 원수가 모여 있는데서 윤곽이 다 결정 된 거에요. 기초가 다 되어있었고 그때 소련에서는 16개 공화국을 다 유엔에 참석시켜야 되겠다. 루즈벨트 .... 해서 소련이 후퇴하고 결국은 소련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세 나라만 16개 공화국 중 가장 선진국 이라 할 수 있는 세 나라만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고 사실 그때 결정된건데. 한국을 참석시키는 문제가, 루즈벨트가 4월에 죽고, 죽고난 직후에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한국이 참석하는 기회를 국무성에서 검토하게 된거에요. 그때 런던에 망명중인 정부들 얄타때는 물론 다 .... 본토가 독일군 점령하에 있는 나라가 .... 말이에요. 금방 해방되어서 정부는 런던에 있는 상태 이런 나라들도 다 유엔 창립멤버가 되었어요. 유엔 창립멤버는 아마 브라질 등 2~3개 국가를 빼놓고는 1차 대전때 연합국에 가담한 국가에요. 1941년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을 적에 임시정부에서 ....서 11월 12일인가 중경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에서 일본하고 독일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어요. 난 그때 나이가 어리지만 국제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 거의 한 10살 때부터 신문, 잡지 등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임시정부가 .... 같은 일본하고 싸워가지고 .... 선전포고를 ....’ 지나고 보니까 임시정부에선 그런 걸 다 생각을 한 거에요. .... 국제문제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후에 일본이 패망했을 때 그 승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자격을 생각 했던 것 같아요.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가지고 참전국이 되었고 당연히 .... 받을 수 있는데 그때 한국을 참석시켜야 한다고 중국국민정부에서 강력히 주장을 해서 미국에서도 .... 승인한 상태였는데 중국 정부에서 ....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대표를 부주석을 김규식 박사, 부대표를 외무부상인 조소앙 선생, 외무부 차관은 정한성 박사를 수행원으로 해가지고 세사람의 대표단을 뽑고 ....에서 여권까지 내줬어요. 비용까지도 떠나기 직전에 주겠다. 그때 임시정부에서는 중국정부에다가 돈을 걷어 달라 한 적이 별로 없어요. 임시정부가 갚겠다고 .... 김구선생이 장개석 주석한테 편지를 써요 .... 않다 그리고 .... 사실은 난 어렸을 때 그 .... 먹고 살고 .... 그렇게 했는데 .... 돈을 빌려주겠다 라고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나중에 .... 미국에서 반대해서 무효가 됐다. 왜 그랬는지 몰랐어요. 몰랐는데. 내가 그 후에 국내에 와서도 몇해 전에야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알았어요. 그 얘기를 이 3페이지 짜리 한겨레 칼럼에 썼어요. 어떻게 된거냐면 이제 임시정부 대표를 참가를 시켜야 되겠는데 그때 미국 국무부에는 한국문제에 대한 .... 전문가가 있었어요. 닥터 매큔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큔이란 사람은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 태생이에요. 우리말을 아주 잘했어요. 그리고 우리 지명에 보면 부산이면 BUSAN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쓴게 몇해 안되요. 그 전까지 미국에서 나온 한국 시정보는 푸산으로 되어있어요. PUSAN. 전라북도라고 하면 Chollapukto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매큔-라이샤워 시스템 이라고 한글을 노멀라이즈 하는 시스템이 있었어요. 그 시스템을 만든 두사람 중에 하나에요. 라이샤워는 누구냐. 역시 선교사 아들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우리말을 잘하는. 주일 대사를 했던 라이샤워하고는 아마 형제인지 사촌인지 그럴거에요. 매큔-라이샤워 시스템을 만든사람은 하버드대학교에 언어학 ....하는데 그 맥큔이 그 당시 국무성의 한국관계 자문위원으로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이승만도 알고 도산 안창호 선생도 알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고 한국문제를 잘 알고 있었어요. 매큔이 생각하기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 치하에 있는 한인은 대표할 수 있어도 그 이외의 사람은 대표할 수 없는데, 다른데 대표자들을 참석시킬수는 없어도 미국의 한국인들이 .... 그 사람들의 대표자들은 임시정부 대표와 협력 시켜야 한다. 그런 견해를 미국무성에서 내리고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합하도록 통합한인위원회라는 이름을 미국무성이 지어주고 여기 가입해달라. 그래서 너희들이 한국 대표로서 임시정부의 대표와 함께 .... 참석 .... 샌프란시스코 회의 .... 그때 대표가 참석을 했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는 거에요. 임시정부가. 중경에서는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 했는데 미국무성에는 세사람만 .... 하면 됐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지만,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미 대표니까 임시정부 관계 가까운 사람들을 대신해서 참석해주고, 하나는 미주한인의 80%가 가입되어 있는 재미한국연합회의 외교위원장으로 워싱턴에 상주하고 있는 김용중이라는 분이 있어요. 워싱턴의 재미한국연합회에서 만든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기구가 있어요 그 기구의 책임자 .... 국무성하고 꾸준히 접촉해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꼭 참석시켜야겠다. 또 하나는 한길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실제적으로는 미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고 자기는 재일한인회의 대표로서 미국에 2차대전때 망명을 해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 셋이서 통합한인위원회의 가입하면 코리아 커뮤니티의 대표로 임시정부 대표단에 합류시켜서 참석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김용중씨도 또 한길수 씨도 흔쾌히 허락했어요. 이승만을 도와주는 것 보다도 그래야 우리가 유엔 중요한 회의에 우리나라 대표가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다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승만이가 저들하고는 일 같이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한국이 유엔창립멤버가 될 기회가 그때 사라지고 만거에요. 우리가 .... 것은 소련이고. 막 일본군의 무장해제 .... 함으로써 38선이 일시적으로 생길 수 있어도 그때 만약 우리가 유엔 멤버가 되었다면, 자동적으로 국제적인 멤버가 되는건데. 그랬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8개월 후에 한국의 정부로써 들어올 수 있었을거에요 아마.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거에요.

 

 

여러 노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던 임시정부

 

아마 소련이 대부분이 보수적인 임시정부 .... 그냥 와서 남북한을 통치할거야 하는데 쉽게 동의 안할거에요. 왜냐하면 .... 때에요. 지하에서 항일투쟁하다 .... 가입시켜야 된다. 또 소련에 망명한 사람들 대표도 참석시켜야 한다. 또 옌안에 있는 중국공산당 .... 사람들도 대표단 가입시켜야 된다. 그러면 임시정부에서는 그걸 거절을 했느냐. 절대로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 1945년 당시에 ....는 어쨌든 서신 내용이 있고, 재미한국연합회에선 ....이 있었는데도 돈을 보내줬어요. 그건 뭐 남이 아니고 수시로 연락이 있는 사이고 임시정부에서는 이제 일본이 .... 그러니까 .... 전에 임시정부가 불쑥 들어오는거 보다는 옌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소련에 있는 망명자들 그때 김일성이가 소련에 있다는 것을 ....에는 다 알고 있었어요. 8. 15 후에 김일성이 .... 말이 나오고 있지만 .... 다 알고 있었고, 그 부대가 어디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국내에도 자유투쟁 ....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한사람을 국내에 맨먼저 파견을 했고, 그 다음에 옌안에 한 사람 파견하고, 한 사람은 소련에 파견을 했어요. 그러니까 8. 15후에 자발적 ....을 했다는데 ....가 없어요. 국내 파견한 사람은 오다가 잡혀서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다가 나왔고, 옌안에는 임시정부 ....중에 장윤상(?) 이란 분이 계세요. 아마 8. 15 후의 역사 공부 한 사람들은 알거에요. 장윤상(?)이라고 중도 좌파에요. 그분을 옌안으로 파견했어요. 장윤상(?)씨는 옌안에 .... 파견했어요. 장윤상씨는 옌안에 수장으로 있는 김두봉씨하고도 친한 사람이에요. 김두봉씨는 김구선생하고도 아주 친한 사이에요. 옌안으로 가기전에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에요. 어쨌든 장윤상씨를 옌안에 파견했는데 가있는 동안 일본이 항복했어요. 그러니까 옌안에선 .... 할 필요 없지 않냐. 소련으로 파견을 간 사람은 내몽고까지 갔다가 소련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해방이 되었어요. 임시정부에서는 폭 넓게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만약 소련에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가입시켜야 되겠다. 국내에서 이런 사람들을 가입시켜야 되겠다. 이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가입시켜야 되겠다. 라고 했으면 김구선생님은 절대 반대 안하고 환영했을 거에요. 자기가 소수가 되어도 환영했을거에요. 그런데 결국은 그런 기회를 다 놓치고. 8. 15 이후에 임시정부 들어오는 것도(?) 죄인자격으로 들어오고. .... 군정당국의 .... 임시정부 사실상 해체하고 들어오는.... 그래서 .... 할 수 없었고. 와서 물론 임시정부 활동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두 개의 정부가 수립이 되었죠.

 

 

두 개의 정부, 공통된 목표 통일, 예견된 전쟁

 

여기(강연자료) 그 사이에 6. 25 전쟁 날때까지 들어있는데 전쟁은 분단의 결과로 꼭 나게 되어있었어요. 48년에 선거를 통해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또 북쪽에는 이미 단독정부가 수립 반은 된 상태에서 남쪽이 ....하니까 얼씨구 좋다고 ....북쪽서 그랬어요. 북쪽정부와 남쪽정부가 똑같은 공통의 목표가 있어요. 둘다 지금은 우리가 이북의 정부를 승인하고 있고 유엔에 둘다 가입했으니까 이북도 남쪽을 사실상 승인하고 있다 이거에요. 서로 승인한 상태인데 그 당시에는 둘다 똑같이 한반도 전체정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서울에 있는 정부도 이승만 정부도 한반도 전체가 우리땅, 우리나라다 평양에서도 평양이 임시수도고 한반도 전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리고 두 나라가 똑같은 지상의 목표가 있어요. 통일이에요. 그럼 북은 상대를 .... 하고 대화를 안하고 둘다 통일을 원하고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잖아요? 그게 48년 당시에 너무나 명확했어요. 내가 20살 때, 남한이 단독선거를 하고. 그때 김구선생은 양쪽 정부가 따로 수립된 데에 책임의식을 느끼고 .... 해 버립니다. 실제로 남한에서 대부분이 정부수립을 반대한 거에요. 근데 모든게 45년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여 했으면 이런일도 없죠. 38선 ....하고 정부는 대한민국 입성하는 것 승인을 받는게 될텐데 그걸 결국은 이승만이 실패로 .... 이 내용은 로버트 올리버가 쓴 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 박사의 아주 충실한 추종자에요. 이승만도 그 사람을 너무나 좋아해서 8. 15후에 유일한 미국사람 고문으로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죠 경무대에 녹을 받고 밑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올리브 박사도 이때 통합한인위원회에 가입하고 고집을 부리지 말라고 이승만한테 권유했는데, 이승만이 거절했다는 거죠. 그런데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을 항상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 고집을 부린거에 대해서 소신을 꺾지 않은 사람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소신은, 개인적인 소신을 꺾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사람들이 공산당도 아니에요 김용중 그분은 재미한국연합회 대표고 그런 사람을 갖다 이제 .... 하겠다 하는 것은 고집이자 아집이고 애국심보다는 개인감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요. 하여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쪼개지고 지금도 통일이 안된 가장 큰 원인이 하나가 얄타회담때 루즈벨트가 신탁통치문제를 얘기했어요. 루즈벨트는 1차 대전때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라는게 잘못되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 독일 식민지를 영국에 위임통치, 프랑스에 위임통치, 벨기에에 위임통치 .... 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는 일본에 위임통치 받았는데 일본에 .... 식민지로 .... 결국은 .... 거예요. 잘못되었다. 그래서 루즈벨트는 한 나라한테 맡기면 안 되고 다 국가 공동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미-영-소-중. 중국은 이제 국민당 치하의 정부, 우익 친미적이고. 4개국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그때 그 얘기를 처음 꺼냈어요. 꺼낼 적에 루즈벨트는 그 신탁통치에 대한 계획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어요. 유식한 사람인데 적어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어요. 한국 같은 나라는 독립할 자격이 없다 이거야. 그 필리핀은 40년 동안 미국이 교육을 시켰는데 아직도 독립이 안되었는데, 하물며 40년 통치 받은 코리아야 어떻게 자격이 있겠냐. 그전에 필리핀은 .... 치하의 나라, 국가 형성을 못했던 나라고, 우리나라는 그전에 적어도 2000년 이상의 중앙집권체제가 지속된 나라인데, 그걸 루즈벨트는 전혀 몰랐던 거 같아요. .... 그래서 한국을 50년 동안 신탁통치 해야겠다는 말을 루즈벨트가 했는데. 그때 정식의제가 아니에요 비밀문서에 있는게 말하자면 요즘 김정일과 노무현대통령 얘기한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그냥 둘이 대담한 것이지. 루즈벨트가 50년 얘기 하니까 스탈린이 그건 너무 길다. 나중에 루즈벨트가 적어도 5년 이상이라는 말로 후퇴했어요. 10분의 1로. 그때 분위기는 의제도 아니고 서로 감정을 .... 상하게 .... 전 잘 모릅니다 이런 소리는 하기 싫으니까 스탈린이 더 짧으면 더 좋죠. .... 우리나라 문제는 토의가 끝났어요. 신탁통치 얘기가 그때 나왔고 그것이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영이 되어서 .... 가 결정이 된 거고. 모스크바 3상회의 때도 소련은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했어요. 그런데 미국대표단에서 신탁통치 해야 한다. 루즈벨트의 뜻을 받들었죠. 그때도 결국은 소련의 의견에 따라서 최장 5년으로 되어있어요. 루즈벨트는 적어도 5년이라고 했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선 최장 5년으로 되어있어요. 그리고 신탁통치는 분명 미국이 주장했다는 게 기록으로 나와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소련에서도 역시 소련 주장이 .... 임시정부를 수립해가지고 .... 전체적으로 .... 5년 이내로 독립할 자격이 갖춰졌다고 생각하면 독립할 수 있다. 이게 모스크바 3상회의인데 그 결과가 발표도 되기 전에 우리나라 우익신문들은 대표적인 게 동아일보였어요. 이 우익신문들이 미국이 즉시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거꾸로 .... 3상회의 발표문에는 어떤 주장을 누가 했다는 것은 안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지금은 다 나와 있지만. 30년이 지나서 미국에서도 비밀문서를 해제했죠. 

 

 

강연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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