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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박성환 / 청년칼럼 / 2014.10.18 121.166.72.127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더연 칼럼위원 3기 박성환

 

                                                                              (※이 칼럼은 지난 8월 8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성 문화에 대해 지극히 도덕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한국 사회에서 매춘 문제는 참으로 민감한 문제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종류의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해보려는 것 자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주장의 논리적 결함보다 이러한 논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성적인 도덕성이나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국가와 우리 사회는 매춘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매춘을 포함한 성적인 거래행위에 대해 그동안 사실상 방임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개선하고자 한 한국의 페미니즘과 성 도덕성을 수호하자는 한국 사회 특유의 보수적 분위기가 결합하여 매춘에 대한 근절을 주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2004년 성매매 방지 특별법 제정 이후,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매춘은 근절되었는가? 오히려 매춘은 국가의 통제를 피해 더욱더 음성적으로 진화하였을 뿐이다. 또한, 매춘 종사자의 인권 보호를 외치던 페미니스트들의 당찬 구호는 위선임이 증명되었다. 매춘 행위 자체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법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매춘 여성들은 살기 위해 악랄한 포주나 조직폭력배 집단에 더욱더 의탁함으로써 점점 더 비인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있으며, 부당한 처우를 감내하고 있다. 겉으로는 경건한 성 도덕성을 부르짖는 엄숙주의가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반면, 면적당 유흥업소, 변종 성행위업소, 모텔 밀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현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인은 매춘이 결코 ‘인간의 바람직한 성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춘을 근절하려는 국가의 정책과 매춘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매춘 근절과 매춘 여성 인권개선은커녕, 오히려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악화시키고, 매춘의 범죄화 측면만 강화했을 뿐이다. 매춘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그 날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춘의 근절을 주장하기에 앞서 매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매춘에 대한 한국의 페미니즘과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시선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자 한다.

  

 전술했듯이 매춘뿐만 아니라, 성적인 문제에 관해 한국인들은 논의 자체를 꺼린다. 특히 여성에 대한 순결을 강요하고, 가족의 생산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생활에 대해 금기시하는 엄숙주의 풍조가 짙게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그런 것에 대해 부도덕한 것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매춘에 유독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데에는 성적, 육체적 쾌락을 그냥 다짜고짜 ‘나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과거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이 육체적 쾌락을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고, 근대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도 자신의 저서인 ‘공리주의’에서 ‘정신적 쾌락을 고상한 것, 육체적 쾌락을 열등한 것으로 정의하는 등 쾌락의 서열화’를 주장한 것을 보면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육체적 쾌락을 그저 불경하고 부도덕한 당위적 개념으로 보았다. (이와는 모순적으로 매춘은 오랫동안 방임함) 사실 여기서부터 큰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종교적 신념이나 관습에 기반을 둔 도덕주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열린 대화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춘이 부도덕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가? 아니, 국가나 사회가 매춘을 포함한 성적인 욕구 자체를 불결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권리는 누구로부터 위임받았는가? 오히려 매춘이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논의가 시작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극단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도덕적 당위성을 들먹이며 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열린 사회의 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러한 필요 이상의 완고함은 매춘 문제의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다.

  

 먼저 매춘에 대한 논의에 앞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이 글에서의 바람직한 매춘의 정의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합의를 통한 쌍방의 직접적인 거래행위’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일방의 위협과 완력에 의한 강요나, ‘자본에 의한 제삼자의 착취가 개입된 매춘’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엄연한 범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이 글에서 논의하게 될 매춘 종사자의 정의는 결코 ‘여성 매춘 종사자’만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성의 성적 욕구 표현이 존중받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에 따라 여성 고객들을 위한 윤락 남성과 남성 매춘 종사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이 차별받는 남성중심사회에서 흔히 매춘이 성행하기 때문에, 여권(女權)이 신장되면 자연스레 매춘이 감소하고 여성이 해방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달리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회일수록 성적 욕구를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성적 서비스를 기꺼이 소비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매춘을 통제하고자 한 국가 정책과 성 도덕주의와 매춘 여성 인권 개선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노력은 과연 성공했는가? 매춘에 대한 서구의 국가 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전면금지였고, 다른 하나는 제한된 구역에서의 국가 주도의 공창제 시행이었다. 국가에 의한 매춘 전면금지는 주로 ‘도덕적 측면 내지, 가족제도의 보호’를 위해서 시행되었는데, 그러한 단속으로 매춘행위를 근절할 수 없었고, 남성의 성욕에 기반을 둔 ‘수요’와 경제적 생계를 위한 매춘여성의 ‘공급’이 맞물려 더욱 음지로 들어갔을 뿐이다. 더구나 범법자가 된 매춘 여성은 생존을 위해 소위 ‘기둥서방’과 같은 폭력배에게 의존해야 했는데 그 대가로 매춘여성들은 이들의 성적 학대와 폭력에 늘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매춘 정책을 강력히 단속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관리들조차 ‘성욕이 왕성한 정상적인 남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류층을 위한 ‘고급 프리랜서 창녀 시장’이 암암리에 형성되었음은 물론이다.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매춘금지 정책은 서서히 국가 통제의 ‘제한된 공창제’로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공창제는 매춘구역의 임의설정과 매춘여성의 거주제한을 골자로 하였다. 행정당국이 관리하기 쉽게 이들을 명부에 등록하고 매춘여성을 사회와 ‘격리’ 시킨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매춘여성을 국가가 항시 감시해야 할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또한, 매춘에 대한 기존의 부도덕한 인식의 전환 없이 제도적으로만 허용하는 상황에서 매춘 여성은 국가의 통제와 더불어 ‘사회의 낙오자’, ‘불결한 존재’라는 사회적 낙인을 동시에 감수해야만 했다.

 

  19세기 들어 신장된 여권(女權)을 바탕으로 매춘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들은 어떠했는가? 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초창기 기조는 ‘도덕주의’였다. 매춘 자체를 ‘부도덕한 사회적 병폐’로 보았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도덕주의에 따른 자기주장은 종교적 신념과도 같아서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과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논의 자체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은 이들이 주장하는 성에 관한 도덕주의와 윤리적 기조가 바로 기존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여성 순결 강요문화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매춘이 남성중심의 질서를 지탱하는 문화로 규정하고 매춘의 혁파를 통해 여성해방을 주장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들이 기껏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여성의 육체와 성적인 자기표현이 저급하고 부도덕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순결을 지키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성상’을 강요하는 남성중심의 성 메커니즘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남성우위의 위계적인 성별 계급 사회로의 편입을 자청하는 꼴이었다.

 

  후에 나타난 ‘온정주의 페미니즘’은 계몽을 통해 매춘여성의 각성을 시도했고 여성지배를 상징하는 매춘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하지만 온정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교육받고 선택받은 여성 특권계층이자, 매춘여성에게 여성의식을 계몽하는 ‘성스러운 선지자’로 규정했던 것 같다. 이는 매춘여성이 여성으로서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타율적 존재이고, 교화하고 선도해야 할 ‘가여운 존재’,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식민주의’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대동단결을 주장하지만, 실상은 여성계층 안에서 자신들이 일등 여성, 나머지는 계몽해야 할 이등 여성으로 규정하는 ‘여성 계층 내부의 분화와 서열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온정주의 시각은 ‘매춘 행위가 일부 매춘 여성에게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발적인 직업선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한다. 2004년 이후, 한국에서 용산 성매매 업소에 대한 대대적 철거 정책이 시행되었다.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며 거리에서 시위한 매춘 여성들에 대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매춘여성의 자발적인 시위가 아니라, 그들의 사상마저 포주에게 포획되어 포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생존권을 위한 시위를 마치 일종의 ‘스톡홀롬 증후군’ 따위로 치부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선민의식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들은 ‘주체적인 자아를 인식하고 실현하는 개화된 여성’이고, 매춘 여성은 ‘정상적인 의사표현조차 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그 오만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이처럼 일부 페미니스트의 성 도덕성과 여성해방에 근거한 매춘 근절 정책은 매춘 근절도, 매춘 여성의 인권도 개선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일부 페미니스트의 도덕주의와 온정주의에 근거한 매춘 근절 정책은 매춘여성의 후생 측면에서도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저 그들은 도덕적 신념에 의해 무조건적인 매춘 금지를 주장했을 뿐, 매춘 여성의 생계유지와 사회적 자립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성도덕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의 직장을, 삶의 터전을 짓밟는 탁상공론식 정책들만 제시했을 뿐이다. 이들은 어떠한 경제활동에서 추방당한 자본과 노동력이 아무런 추가비용 없이 곧바로 다른 산업 활동에 투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수십 년간 조선소에서 기술공으로 일하다 은퇴한 노동자가 라면공장 사무 부서로 재취업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새로운 경제활동에 대해 적응하고, 이전의 경제적 수입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매춘 종사자의 사후 경제활동을 보장해준답시고 그들의 기존 직업과는 전혀 다른 산업에 바로 투입시키는 행위로서 그들이 이전처럼 ‘부도덕한 매춘’을 안 하고도 이전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새로이 직면한 경제 환경에 대해 직업적 전문성이 전무한 그들은 앞서 예를 든 재취업한 조선소 기술공의 사례와 같이 경쟁에서 도태되어 또 다시 경제적 빈곤층으로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매춘 자체를 엄연한 하나의 노동, 혹은 정당한 경제적 거래 행위’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사용자에게 제공하듯이 매춘 종사자도 자신의 노동을 고객에게 제공한다. 다만, 노동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물론 혹자는 인간의 감정과 성을 돈으로 주고 사는 행위가 도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용인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겠지만, 인간의 노동이 거래되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노동을 제공해야만 하는 노동자의 감정적, 육체적 비애 역시 매춘 여성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을 파는 매춘 여성의 행위는 비극적이고, 마찬가지로 생계를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혹사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의 행위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노동윤리인가? 임금노동이 정착된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임금을 매개로 이루어진 노동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이다. 특급선수들은 해당 구단에 의해 ‘몸값’이 매겨지고, 구단 간의 경제적 거래로 영입되고 이적하는 ‘하나의 상품’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와 스포츠 선수가 임금을 매개로 자신들의 신체적, 지적 능력을 누군가에게 제공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매춘 종사자도 임금을 받는 대가로 성 소비자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할 뿐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고용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없다가, 유독 매춘에 대해서만 엄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매춘 근절론자들의 태도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있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고 성적인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있는가? 성적인 거래는 비인격적이고, 상품의 거래는 합법적인 경제활동이라고 칭송하는 그 도덕적인 기준의 정당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고도로 상업화된 자본주의를 비난하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비인간성에 대해 비난해야지, 매춘에 전적인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춘은 자본주의 병폐의 직접적인 원인도, 결과도 아니기 때문이다. 매춘은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성욕과 경제적 필요가 어우러져 발생하는 태초의 자연적인 거래 형태이다.

 

  매춘을 노동 행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따른 매춘 종사자의 권리와 인권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임금고용제도 내에서는 고용주가 피고용 주를 착취하거나 임금지급 문제 등 양자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하지, 고용주의 노동력 착취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해당 직장을 폐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 다른 비유로 근래, 학교폭력이 심화하였다고 하여 그 발생 장소이자 환경인 학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가해 학생을 처벌하고 피해 학생을 보호하면 될 일이다. 이 모든 문제가 매춘을 하나의 정당한 노동이자 경제적 거래행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춘 종사자는 임금을 얻기 위해 특정한 형태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성 노동자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매춘 종사자는 임금 노동자로서의 마땅히 누려야 할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매춘 종사자의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지원이 요구된다. 매춘 종사자의 자생적인 결집이 없다면 이들은 더욱더 힘 있는 남성 권력(공식적으로는 행정당국, 비공식적으로는 조직폭력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여성해방은 요원한 길이 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본인은 매춘이 바람직한 형태의 성생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깊은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진실한 감정적, 육체적 교감이 이루어져야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매춘은 성적 자기표현과 경제적 목적이 결합한 행위로서 그 역사적 정통성이 이미 오래되었다. 매춘 금지 정책과 매춘에 대한 사회적 멸시는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육체적 쾌락을 저급한 것으로 격하했으며, 성욕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도구이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성적 표현에 대한 논의 자체를 터부시하는 분위기 조성으로 이어졌다. 또한, 매춘을 단순히 ‘남성이 소비자, 여성이 공급자’라는 틀로 인식하여 남성 본위의 성 계급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는 여성의 성적 자기표현을 금기시하고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고 음란함을 연상케 하는 부도덕한 개념으로 변질시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불결함’과 ‘원죄의식’을 가지게 했으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자각과 여성해방을 훼방하였다. 또한, 매춘에 대한 금기 풍조는 여성을 결혼제도로 남성의 경제력에 묶어두고, 남성 위주의 순결한 여성관을 강요하는 나팔수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물론, 매춘의 전면적 허용이 반드시 여권을 신장하거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 평등한 선진국일수록, 엄숙주의에서 탈피하여 섹슈얼리티와 성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매춘의 허용이 그 사회가 얼마나 포용성이 있느냐의 하나의 척도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칼럼에서 본인이 정의하는 바람직한 매춘이 ‘상호합의 하에 의한 수평적이고 직접적인 거래’라고 규정하는 것과 달리, 그동안 한국 매춘 시장에서 매춘 인력 중 상당수가 ‘자의가 아닌 채무관계에 따른 강요, 인신매매 같은 범죄’에 의해 충원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 매춘 종사자의 노동력을 착취할 목적으로 매춘을 강요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다. 기존의 매춘 행위는 양자 간의 그 거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자본을 가진 제삼자가 매춘 종사자와 성 소비자의 직접 거래에 개입하여 사적인 경제이익을 위해 매춘 종사자에 대한 임금체납, 노동력 착취와 인권을 유린하는 등 범죄화된 측면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남녀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로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쌍방의 합의에 따른 매춘행위를 무조건 부도덕하다고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아울러, 일부 페미니스트와 다수의 사회구성원이 매춘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함에서 위선적인 태도를 찾을 수 있다. 매춘을 부도덕하고 여성의 순결을 주창한 도덕주의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여성해방은커녕, 오히려 남성 중심의 성적 위계질서에 여성을 종속시키는데 기여했으며, 매춘 여성을 교화와 구제의 대상으로 본 온정주의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지적인 오만함을 보여준 ‘여성 내부의 제국주의’였다. 오랫동안 매춘 정책을 통제해온 남성 관료들은 매춘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해놓고 자신을 위한 ‘사적인 고급 매춘 여성’은 사실상 허용한 데서 그 위선과 기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인의 칼럼을 여성과 남성들에게 매춘을 독려하거나, 권유하는 논지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전술했듯이 매춘은 바람직한 형태의 성생활이 아니다. 다만, 매춘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사회적 풍조나 정책이 매춘 종사자는 물론, 일반적인 남녀의 성에 대한 담론을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며,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성적 관념을 부추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울러 매춘을 무작정 없애자고 주장하기 이전에 ‘매춘을 포함한 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위선적인 태도, 우리 내부의 차별주의, 도덕적 선민의식’에 대해 먼저 반성하는 게 순서가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 특유의 성에 대한 엄숙주의와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가 사라진다면 ‘굳이 매춘 자체가 필요할까?’ 라는 의문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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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성환 / 부편집장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며 가슴으로 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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