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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더 이상 가족은 없다.

더연 / 청년칼럼 / 2014.07.26 115.23.186.180

더 이상 가족은 없다.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복지제도 축소가 주요 골자인 작은 정부와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반대 세력의 비난에 대처 총리는 그 유명한 “사회란 없다, 다만 가족과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사회가 개인의 모든 불평등을 구제할 수는 없으니 개인은 자신의 능력과 가족에 의존하라는 대처의 논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한층 더 과격하게 진일보했다. 사회는 고사하고 이제는 가족조차 더는 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가족은 없다.”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한국의 전통적 대가족 제도는 80년대를 기점으로 부모와 미성년 혹은 미혼자녀가 기거하는 4인 기준의 핵가족 제도로 변화했다. 하지만 오늘날 핵가족 제도마저 위기 징후가 여기저기서 관측되고 있다. 맞벌이 가족의 증가, 이혼율 증가에 따른 편부모 가정, 혹은 이혼 남녀끼리의 결합 등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족 제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결혼 제도의 위기’이다. 취업 등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다거나, 가치관의 변화로 독신이나 동거를 고수하는 청년층이 많아진 것이 이유이다. 문제는 가족 제도로 나타나는 사회변화 속도를 오늘날 복지 행정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족은 국가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는 기본적인 수혜 집단 단위이다. 그런데 다양하게 변화한 가족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복지 당국의 보수적인 태도에 인해 가족이 개인을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가령, 저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의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80이 넘은 노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부양가족이 있으니 국가가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논리이다. 노부모의 노후는 국가가 아니라 자식이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한국 특유의 유교적 봉양 문화는 ‘사회가 아닌 가족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영국 대처리즘 복지 제도’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있다. 그렇다면 이혼으로 이미 새 가족을 꾸리고 있는 노부모의 경우는 어떠할까? 현행 복지제도로는 전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경제적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경우 부모 역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부모, 자식 간의 법적인 관계 청산은 물론이고 수십 년간 교류도 없었던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봉양 의무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복지 당국이 가족의 개념을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실질적인 동거를 하는 관계’가 아닌 ‘혈연의 관계’로만 파악하는 구시대적 개념에서 전혀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족 제도는 성 가치관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개방적인 성문화의 도래, 인스턴트 연애의 확산은 미혼모 가정과 혼전 동거 연인 문화의 증가로 이어진다. 관대한 성 문화와 더불어 혼전 동거 연인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럽과 달리 미혼모는 한국 사회에서 또 다른 주홍글씨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과 편견의 문제와 별개로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만을 고집하는 당국의 태도는 이들에게 이중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미혼모 복지를 위한 별도의 근거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복지 지원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또한, 호주제와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에 인해 미혼모의 자녀는 사회적인 편견뿐 아니라 제도적인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미혼모 지원 정책에 대해 일각에서는 개인의 일탈에 의한 결과를 왜 국가가 책임지느냐고 비난하지만, 미혼모 가정과 동거 커플의 증가는 개인적 일탈보다는 ‘변화하는 사회 가치관, 가족제도의 결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수순’이다. 구직조건이 높아지고 근로 조건의 질적인 향상이 둔화되는 현실적 한계와 결혼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는 미혼모와 동거 커플이라는 새로운 가족 제도의 출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직시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 제도를 충족할 새로운 복지 제도를 정립해야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적지 않은 서유럽 국가에서는 미혼모, 동거 연인에 대해 사회적 인정을 하고 여러 가지 거주, 육아 등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프랑스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이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감소를 우려할 때, 높은 출생률을 유지하고 있다. 높은 출생률이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가족제도의 변화는 부부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이혼과 별거, 또는 여러 가지 이유의 가정불화에 인해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출 청소년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가출 청소년 범죄가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오늘날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대책을 가족 제도의 인식 전환으로부터 찾아보고자 한다. 가출 청소년들이 성매매, 강도 등 범죄의 길로 쉽게 빠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생계 문제 때문이다. 이들이 아르바이트 등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현행 고용법에는 미성년자 취업 시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가출 청소년의 대부분이 가정폭력 같은 가정의 불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온 상황에서 부모의 동의를 받는 것은 이들에게 두 번의 고통을 주는 것이고 비현실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출 청소년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반응은 으레 “배가 불러서 가출이나 한다, 아무리 부모가 가혹하게 대할지라도 먹여주고 재워주는 건 부모이다.”라는 식으로 가출을 한때의 철부지 행동으로 치부하고, 가출 청소년의 가정 복귀를 종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가정불화에 대한 문제를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칠곡 계모 아동학대 및 살해 사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존속 범죄보다 비속 범죄에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을 주는 한국 특유의 사법문화, 자식을 부모의 개인 소유물인 것을 인정하는 양 국가도 자녀 문제에 간섭하기 꺼리는 유교적 풍토를 감안할 때, 가정폭력은 폐쇄성과 가부장적 정당성에 인해 더없이 무시무시한 범죄의 온상이 된다.

 

 

 이러한 학대를 피해서 가출한 청소년들은 대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또래들과 삼삼오오 단칸방에 거주하는데 이들의 주거 환경은 좁고 열악해서 위생문제뿐 아니라, 가출 청소년 간 성범죄, 폭력의 위험성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출청소년끼리 동거하는 것도 또 다른 가족의 형태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한 거주 문제를 국가에서 실질적으로 지원, 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출 청소년의 숙식을 해결해주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쉼터는 임시적인 공간이고 국가는 끊임없이 이들의 가정 복귀를 강요한다. 하지만 개별 가정 문제의 해결 없이 이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다. 또한, 이는 가출청소년끼리 동거하며 사는 것을 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 제도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영국에서는 계획적인 프로그램을 부여하는 한국의 청소년 쉼터와 달리 가출 청소년들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제공한다. 또한, 가출청소년에게 거주제공뿐 아니라, 특정 기업이 직업교육도 병행하여 이들에게 가정 복귀라는 무책임한 요구를 하기보다 ‘사회에서의 홀로서기’를 도와준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은 이제 없다. 전형적인 핵가족 제도는 외형적으로나마 상당기간 존속하겠지만, 이혼 남녀끼리의 결합 가정, 미혼모 가정, 혼전 동거 가정, 가출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가정 등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핵가족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조차 구성원들 간 생활 방식의 부조화에 인해 내부 분화를 겪고 있으며, 그들에게 가정이란 그저 ‘다음날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반면, 국가가 인정하는 복지 제도 수혜 집단으로서의 가족의 개념은 이러한 변화를 전혀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가족을 ‘뜻이 맞는 구성원들이 유대관계를 맺고 실질적으로 동거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쉽게 혈연관계라는 사회적 통념으로 재조직한 집단’으로 간주한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구성원에 대한 의무는커녕, 서로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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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성환

"항상 의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딴죽을 걸며 반문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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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시무 2014-10-16 00:49:21

가족의 다양성에 대해 논거적으로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은 당연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세세하게 알아가다보면 거시적인 시각으로도 안목을 넓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면적으로 생각하고 복잡화된 개인의 삶이 불행이라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글이 읽혀져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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