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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에 대한 (비)정치적 비판

김벼리 / 청년칼럼 / 2015.01.18 58.140.189.40

  요새 <국제시장>이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오고 가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영화를 에두른다. 엄밀히 말해, <국제시장>이 아니라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고 해야 할 판이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요소들을 끄집어낸다. 그러니 정치적 대립 각을 세우게 되고, 피 튀기는 혈전이 불가피하게 된다. 나는 이 글에서 <국제시장>을 비판할 테지만, 영화 자체에 충실해 보려 한다. , 이 글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예전 패기 어린 시절과는 달리 영화에 대해 한 마디로 평가 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무엇보다 <국제시장>졸작이라고 단정 지을만한 깜냥이 내겐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국제시장>별로였다. 그 까닭을 아래 다섯 문항들로 나눠서 적어봤다. 또한 이는 <국제시장>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다섯 가지 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 덕수(황정민 분)는 과연 개인일 뿐이었나?

   많이 회자되고 있듯, 윤제균 감독은 영화에 정치적인 뉘앙스는 배제하고, 우리들의 아버지로서의 한 개인을 담아냈다고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덕수는 좁게는 윤제균의 아버지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버지인 셈이다. 그 의도는 좋다. 하지만 정말로 덕수는 일개 개인에 불과한가?

  위에서 밝혔듯, 나는 정치적인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정치적인 것을, 혹은 메타-정치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성. 비정치적이라는 자리에서 비로소 발현되는 정치성.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다음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덕수의 무기력함은 무엇인가? 나는 덕수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봤다. 흥남철수, 파독, 베트남 전쟁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파편적 흐름 속에서 덕수는 다만 부지런히 눈앞의 세월을 좇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기력함의 원인은 덕수가 별다른 특이한 사항도 없는 그저 그런 사람 일반으로 그려진다는 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개성적 인물이랄까. 이건 분명히 감독의 의도였다. 덕수는 결코 특이하거나 개성적인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덕수는 아버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여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덕수는 우리 아버지들의 표상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표상이라는 것이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아버지들 모두의 개인적 역사를 집적한 표상으로서 덕수개인이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민족이다. 1950년대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러므로 도저히 나는 덕수의 시선을 한 개인의 시선이라 믿으며 따라갈 수 없었다. 덕수가 한 개인이라면, 허지웅 등의 정치적 비판은 물론 가당치 않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덕수에게 베트콩들은 분명 죽여야 할 적에 불과하다. 애국가가 울리면 마땅히 자리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어야 된다고 덕수는 배웠다. 덕수는 보이는 것만 보았고, 영화는 그런 덕수를 그려냈다. 하지만 덕수가 일개 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대변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 바로 비정치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이는 정확히 정성일이 봉준호의 <괴물>을 정치적이라고 했던 맥락과 일치한다.(「괴물적인 것, 삑사리의 정치학」, 『필사의 탐독』) 윤제균 감독의 비정치적인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며, 관객들이 정치적인 해석을 꺼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정치적인 것(덕수라는 개인)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작동하는가. 반대로 정치적인 것이 어떤 식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탈바꿈하며, 그 효과는 어떠한가?

 

2.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무거운

   솔직히 <국제시장>이 아예 재미가 없거나 보지 못할 정도로 못 만든 영화는 아니다. 윤제균 감독의 전작 <>이나 <해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가 여러 번 등장한다. 또한, 매번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꽤나 성공적인 배치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무거운 장면들도 잘 구사해낸 편이다. 폭발이나 탄광이 무너지는 사건은 무겁고 비장하게 다뤘다.

   그런데 중간이 없다. 비유컨대 영화를 다 본 뒤 화장실에 들른 나는 마치 조울증에 걸린 사람과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우울해 하다가도 어느새 기쁨을 주체 못 하는 감당하기엔 버거운 대상과. 개인적으로 이병우가 음악감독을 해서 기대했지만, 음악은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어떤(울어야 할, 혹은 웃어야 할) ‘타이밍을 알려주는 수단의 역할 정도로 그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카메라의 움직임도 뛰어가는 아이들을 좇는 등 밝은 장면에서는 한없이 가벼이 날아갈 듯 움직이다가, 금세 비장한 장면에서는 예외 없이 슬로모션을 걸어버린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잘못 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웰메이드 영화들도 얼마든지 있다. 어떤 식으로 만들든 간에 그 의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 <국제시장>에서의 이러한 구성은 영화 판에 꽤 오랜 시간 몸 담아온 윤제균 감독의 매너리즘의 결과이지 싶다. 그러니까 감독은 관객을 끌어 모으는 방법, 그 요소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영화 전체를 그러한 요소들의 집합쯤으로 만든 셈이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3.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장치들

   앞선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감독은 관객들을 울고 웃기는 장치들을 잘 알았고, 그걸 남발했다. 일종의 강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정주영, 이만수, 남진, 나훈아 등이 등장하는 씬들도 그러하다. 처음 정주영에서 나는 솔직히 뻥 터졌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러한 장치들에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웃지 못했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여차하면 등장하는 덕수의 내레이션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건 처음부터 뜬금없긴 했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자 나중엔 오히려 공중에서 들리는 덕수의 울리는 목소리에 ()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슷한 장치들이 반복되어 나오는 이상, 그건 클리셰에 불과하다. 이후로 그것은 웃어라는 전언, ‘울어라는 전언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한 마디로, 식상하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합리적) 기대때문일 테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뒤에 숨겨진 작동 메커니즘을 깨달았기 때문일 테다.

   왜 그런지는 감독만이 알 것이다. 아니, 감독도 모를 수도 있겠다. <>이나 <해운대>에서도 그런 면모들이 얼핏 드러나긴 했지만 이번 <국제시장>처럼 적나라하진 않았다. 혹여나 관객 수에 대한 자본의 압박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감독의 개인적 철학이 확고해진 것일까? 대중 친화적 영화를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혹시 그 무엇도 아닌 감독 역량의 문제인 걸까?

 

4. 파편들의 불협화음 - <포레스트 검프>와의 비교

   감독의 역량, 혹은 자본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시장>은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 굵직굵직한 사건의 파편들이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뭐랄까, 이 파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게 없달까. 루카치의 총체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벤야민의 성좌(별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파편들이 문제가 아니다. 다만 파편들이면 문제가 된다.

   <포레스트 검프>(로버트 저메키스, 1994)<국제시장>과 같은 구조다. 엄밀히 말해서 <국제시장><포레스트 검프>와 닮았다. 둘 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개인의 편력과 연결했다. 파편적인 사건들을 다뤘다는 사실은 두 영화가 동일하다. 하지만 위에서 살폈듯 파편들의 병렬적인 나열에 그친 후자와는 달리 전자는 단순히 파편이 던져지듯 나열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에는 사후적으로 파편들의 연쇄, 그 모든 걸 하나로 이어주는 순간이 존재한다. 다시, 벤야민의 '별자리’. 별 하나 하나 떠 있는 하늘. 거기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들을 순간적으로 단 하나의 이미지로 묶는 별자리파편들의 불협화음이 아니라, 개개의 파편들이 전체로서 가능한 찰나. 결코 그것이 총체적 하나는 아닐 지라도, 일시적으로나마 하나 되어 현현(懸懸)하는 순간. 이 지점이 <포레스트 검프><국제시장>의 결정적인 변별점이다.

 

5. 의사(擬似)-재난영화?

   천만 관객을 넘어섰던 <해운대>의 여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제시장>에서는 재난영화의 포맷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재난이라는 소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재난적인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재난적인 포맷이 반복되는 것은 자칫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수 있다. <해운대>만 봐도 재난영화의 전형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해운대>에서 재난적 상황은 앞서 꽤나 오랫동안 유지되던 긴장 이후에야 발생한다. 그러니까 재난 영화에서 재난이란 절정에 해당하는 지점에 등장하기 마련이다. 초반 관객들은 영화에서 진행되는 긴장의 흐름을 같이 하며 점차 고조되는 호흡을 차분히 고른다. 그러다 마침내 발생한 재난에 맞닥뜨린 관객은 거친 호흡을 토해내게 된다. 말하자면 재난영화의 정수는 터질 듯 터질 듯 안 터지다가 단 한번 와르르 무너지는 그 순간에 있다.

   <국제시장>이 이도 저도 아닌 게 된 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안팎의 혼란통, 광산의 붕괴, 폭발, 전쟁 등. 연이어 등장하는 재난적 상황들과, 각각에서 취해진 재난영화의 형식들. 거기서 관객은 의사-재난영화의 연쇄를 볼 따름이다. 거기서 재난적 상황들은 아무런 긴장의 고조 없이, 말하자면 뜬금없이던져진다. 거기서 관객의 호흡은 절정에 치닫지 않는다. 관객은 오히려 어리둥절하다. 이건 위에서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중간과정 생략하고 번갈아 제시되는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유컨대, 처음 만난 두 커플이 갑자기 키스하는 상황이랄까. 만약 그게 멜로 드라마였다면, 관객들은 전혀 콩닥콩닥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제시장>의 재난 포맷은 관객들의 긴장을 쥐락펴락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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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좀 써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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