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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전쟁(代理戰爭)

박성환 / 청년칼럼 / 2015.01.06 61.74.172.87

대리전쟁(代理戰爭)

 

더연 4기 부편집장 박성환

 

(※본 칼럼은 12월 10일에 작성되었습니다.)

 

 과거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녹화사업’은 운동권 학생들을 입대시킨 다음 휴가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다니던 대학의 시위 동향과 운동권 동료들의 정보를 캐오게 하는 프락치 행위를 강요하였다.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시위하러 갔는데 군대에 간 친구, 대학 동기가 전경이 되어 자신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웃픈 에피소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가수 싸이의 ‘챔피언’의 가사 중

 

“전경과 학생 서로 대립했었지만, 나인 같아 고로 열광하고 싶은 마음 같아 오늘부로 힘을 모아 합세 하나로 합체”

 

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 가끔 시위가 격화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정부는 뭐가 무서워서 시위대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까?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각각 시위대와 전경이 되어 물대포와 각목세례를 주고받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수하는 것 보다 그냥 시위대 대표와 정부 대표, 단 둘이 만나 소주 한잔하며 대화를 하든 치고받고 싸우든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면 안 되는 걸까? 애석하게도 오늘날 국가와 기업, 그리고 소위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배계층인 갑은 자기 대신 일을 처리할 ‘대리인’을 일반 대중에서 발탁해 ‘대리전쟁(proxy war)’을 치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형태의 대리전쟁을 항상 감수해야만 한다.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정한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권력 계층은 불만 어린 대중들의 비판과 분노를 결코 직접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그들이 고용한 '대리인'을 전면에 내세워 성난 민심을 달래거나 그것을 분쇄하는 뒤치다꺼리를 대리인에게 외주(outsourcing)한다. 봉건 시대에 지주 대신 소작농에게 지대를 수금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폭정을 수행하는 역할은 중간계급인 ‘마름’이 도맡았다. 오늘날 제품의 품질이나 서비스에 문제가 있거나 국민의 건강과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회사 경영에 대해서 소비자들이 "사장 나오라고 해"라는 식으로 불만을 제기해봤자 기업의 오너나 사장 대신 중간 관리자가 등장해 자신의 회사를 커버하기 바쁘다. 또한, 소비자와 사회적 위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서비스 담당 말단 직원이 경영진 대신 기꺼이 ‘고객님’의 핏발 서린 신경질을 감수한다. 대다수 국민이 공감을 못 하는 정책에 대해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원인과 책임을 물을라 하면 관련 부처 대변인 혼자 나와 ‘자신의 조직과 주군’을 두둔하기에 바쁘고 앵무새 같은 그의 변명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보다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해명을 요구하면 '친절한 답변'대신 언제나 몽둥이와 방패로 무장한 전경들이 우리를 에워싸기 바쁘다. 물론 책임을 져야 할 ‘윗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갑을관계가 사회적 이슈인 대한민국에서 사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갑, 을, 병+@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피라미드 구조의 계서제를 유지하고 그 사이에 ‘을’이라는 관리자 계층을 끼워 병의 불만으로부터 갑이 자신들의 이익과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다. 소위 '마름'의 악역을 담당한 을 계층이 병 이하의 계층의 불만에 맞서 갑 대신 선두에서 ‘몸빵’을 한다. 그들은 생산수단과 생산물들 대부분 독점하고 있는 갑 계층으로부터 그들을 호위해주는 대가로 '소정의 봉급과 특권'을 부여받는다. 결국 오늘날 갑이 점차‘수적 열세’와 민주주의의 확립에 인한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 증가’라는 '이중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꽤 잘 지키는 이유는 바로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호위할 목적으로 대중 안에서 소수를 선택하여 ‘자신의 기득권 행사를 대리할 권력과 부’를 하사하고 그들로 대중을 통제하는 이간책을 통해 '대중의 내부분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안정되고 고착화된 그들만의 철옹성 안에서 안온한 일상을 영유하는 동안, 성 밖에다 밥그릇을 던져주고 그들끼리 무한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치고받고 싸우게 한다. 왜 우리에게 주어진 밥이 이것밖에 없느냐고 을과 병이 대동단결하여 갑에 대항해도 모자를 판국에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영합게임(zero-sum)의 상황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갑이 만들어놓은 게임의 규칙의 부당함은 잊어버린 채, 서로가 '의자 뺏기게임'(의자 수는 참가자 수보다 항상 하나 적고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1인이 탈락하며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됨)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취업을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없는 것을 ‘퇴직을 안 하는 아버지 세대’때문이라고 하고, 정치인들의 무능한 예산 운영으로 인한 재정악화를 공무원 연금 탓으로 돌리며, 비정규직의 증가와 양질의 일자리 감소를 '강성 노조의 기득권 행사'때문이라고 끊임없이 이간질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무능력을 은폐하고 기득권 사수에 위협이 될 만한 대중결집을 사전에 차단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 불평등과 사회적 불만의 모든 원인을 자신의 하수인인 '을'의 전횡이나 다수 대중인 ‘병’의 게으름과 태생적 무능함에 떠넘겨 정작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고도의 기만책을 구사한다.

 

 두발제한 규정과 같은 제도권 교육의 학생 인권 실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에 불만을 품었던 필자는 고교시절 당시,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교사들과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을 하였다. 그런데 머리가 좀 더 굵고 난 지금에서야 그 때를 회상해보니 엄한 상대한테 분노를 표출했던 것 같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힘없고 권한이 제한적인 '평교사'에 불과하였다. 내가 진정 불만을 표시하고 분노를 퍼부어야 할 대상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저 위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만든 정책을 평교사에게 하달할 뿐, 정책의 시행으로 인한 교사와 학생 간 갈등의 아수라장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신선노름에만 열중이다. 민원 제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시민의 편의와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서 일선 경찰이나 민원을 담당하는 말단 공무원에게 하소연해봐야 대개의 경우 돌아오는 대답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더구나 책임과 권한이 복잡하게 세분화된 오늘날 관료제 하의 조직 구조는 이와 같은 '책임 떠넘기기'를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 좀 귀찮다 싶으면‘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한마디만 하면 민원인이 알아서 체념하니까. 정작 대중의 비판과 고충에 대해 겸허하게 귀 기울여야할, ‘위에서 시키는 자들’은 자신의 대리인에게 골치 아픈 그 모든 해결을 떠넘기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커튼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강압적으로 다스렸던 구시대의 통치 방식이 근대에 접어들어 다수결 민주주의와 신분제 철폐라는 그럴듯한 평등주의적 외피를 갖추면서 표면상의 수직구조는 그 의미가 퇴영하였다. 하지만 자본가와 언론인이라는 새로운 지배 계층의 출현은 대중을 좀 더 효과적이고 다소 유연한 방법으로 통치하기 위해 앞서 설명한 ‘관리자 계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대리인 성격이 짙은 관리자 계층은 과거 봉건 시대의 지배 계층이 자의적인 권한으로 심어놓은 꼭두각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업 조직에서 관리자는 봉건 시대의 영주와 기사에게 부여받은 폭압적인 권한과 달리 순화되고 정제된 권한을 행사한다.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는 황제 중심의 일인독재가 아니라 다수 대중의 선택으로 뽑힌 대리인이 국민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한다. 관리자에게 주어진 권한의 표면적 정당성은 역설적으로 대중이 체제의 모순에 항거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오늘날 지배 계층은 관리자 계급을 전면에 내세워 누구나 노력하면 지배층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는 수많은 성공신화를 만들어내고, (사실상 표면적이지만) 직위에 대한 제도적 개방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저항보다 그저 기존 체제가 만들어놓은 사다리를 묵묵히 올라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 카르텔은 요지부동이다. 신라 시대의 골품제도처럼 만인의 평등은 관리자 계층까지만 적용되는 등 그 상한선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일등 노예 감독관’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대중들이 그 ‘일등 노예 감독관’이라도 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 메커니즘은 억압적인 방식으로 행해진다기보다는 대중이 자발적으로 순응하게끔 작동된다. 상업적 광고를 통해 대중의 소유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서로 과잉경쟁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성공의 최소조건을 제시하여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경쟁에서 도태되는 개인은 불량품 취급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구조의 모순적 문제는 개인의 나태함으로 치환된다. 다수의 대중은‘하면 된다.’는 개발독재 시대에나 통할법한 구닥다리 성공 공식에 대한 맹신으로 똘똘 뭉쳐 소외계층에 가까운 현재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들을 미래의 기득권층으로 미리 상정해놓고, 자신들의 정치성향, 사회적 가치의 기준을 현재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는 ‘기득권 코스프레’ 놀이 삼매경이다. 기득권층과 관리자 계층의 교묘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대중은 이를 감내하는 수준을 넘어 새디스트적 쾌감을 탐닉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생존경쟁을 뚫고 관리자 계급까지 올라간 ‘을’은 그럼 자신의 올챙잇적을 생각할까? 새로이 지배 계급에 편입되는 특권을 하사받은 그들은 기존의 기득권층에 더욱 유화적이고, 동시에 자신의 세계관을 기존의 기득권층과 동일시하려는 기득권 코스프레는 더욱 심화된다. 지배계층과의 내면적 일체화에 대한 욕망은 과잉 충성행위로 표출된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대중을 더욱 결박하고 ‘과거의 올챙이에서 현재의 개구리가 된’ 자신의 출세 신화를 쉴 새 없이 읊조리면서 기존 시스템의 정당성을 몸소 입증하려 애쓴다. 대개 침략국의 통치 권력 행사에 나중에 편입된 식민국 출신의 관리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결함과 순혈주의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피지배 동족에 대해 종주국의 지배 계층보다 더욱 악랄한 학정을 일삼았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절, 최상위 지배계층인 터키인들에 의해 고용된 파나리오테스(Phanariotes, 그리스어: Φαναριώτες) 가문의 그리스인 관리들은 ‘터키 지배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그리스인 동족을 포함한 제국 내 다른 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1940년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적 명분으로 일본 제국에 나중에 편입된 동남아 국가를 통치하고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을 관리하는데 에는 일본인 못지않게 친일 조선인이 관리자 계층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이들은 제국 내에서 스스로를 일본인에 이은 ‘2등 국민’으로 상정하고 일본인의 제국 경영을 보좌하는 하청인 역할을 자임하였다.

 

 물론 현재 우리 사회의 관리자 계층, 소위 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부역자와 전적으로 같은 범주 안에 포함하기는 무리가 있다. 또한, 을만을 나무라는 것은 현재 갑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간책) 술책과도 같은 ‘대리전쟁’을 종식하는데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민의에 이반되는,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기업과 정치인의 행위에 대해서 직접 그들의 해명을 듣게 해달라고. 그들이 우리의 친구를, 우리의 이웃을 우리와 대치하게 만들어 대중의 자멸과 기성체제 안으로의 편입을 획책하려는 동일화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르쿠제는 저서 ‘일차원적 인간’에서 선진산업사회의 풍요로움에 따른 자칭 ‘고급문화’의 대중화 현상이 사회 불만을 감소시키고 비판의식을 상실한 대중을 대거 양산하는 ‘계층 간의 동질화 현상’에 대해 우려하였다. 반면, 나는 대중을 ‘경찰과 시위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간 관리자와 말단 서비스 직원’등의 갈등 구도로 재구성하고 마치 선생님이 잘못한 아이들을 불러 세워 서로 꾸짖고 벌주게 만드는 식의 대중의 내부 분화를 꾀하고 자기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짓밟는 경쟁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계층 내의 이질화 현상’도 두렵다.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대중의 노동력을 희생하여 지배 계층의 부와 권력을 증대시키는 ‘통제와 부양’의 메커니즘으로는 더 이상 사회유지와 지속적 번영이 힘들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남의 불행이 단기적으로는 나의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는 사회 전체 효용의 감소를 야기한다. 대리인인 을을 내세워 병을 통제하고 대중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어봐야 결코 갑에게 득이 될 수 없다. 현재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갑은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의 요구와 정의로운 외침에 대해 그들이 커튼 뒤에 숨어있으려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책임회피를 하려는 소극적인 모습 대신 그들의 직접적이고 진심어린 해명을 듣고 싶다. 대중에 대한 그들의 열린 자세를 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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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성환 / 부편집장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며 가슴으로 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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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용문농부 2015-01-16 02:56:15

갑을 문화를 대리전으로 더깊이 파헤치신 글, 좋군요. 갑과 을의 양자충돌로만 보지않고 갑을병의 다자간 갈등으로 넓혀 이해하게 해주셔서 안목이 넓어진 느낌! 양자대결은 한쪽이 한쪽을 이기면 끝나는데 다지간 갈등은 성대를 바꾸는 동시에 자신도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닐까요?
요즘 땅콩따님사건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너무나 취약한 정체노출로 스스로 무너졌다고 밖에 할수 없는, 우리나라 슈퍼갑 재벌3세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미래경제의 상당부분을 담당할 3세들이 이토록 취약한 것은 그들의 몰락만이 아닌 갑을병 공동체의 퇴조징조여서 걱정됩니다.
갑질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을과 병의 공세를 넘어 갑 그들 역시 제자리를 찾아 잘살게 만드는 길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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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2015-02-04 00:16:04

보잘것 없는데다 길기만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자신도 바뀌어야 갑을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땅콩사건이 있고나서 어느 네티즌이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강자에게는 을이지만 약자에게는 갑질하는게 일상화되어있다고 비판한 "너희들이 조현아다."라는 댓글이 생각나네요.

 

갑을병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안에 대해서 물으셧죠? 아직 많은 인생을 살아보지 못해서 제가 감히 말하기는 어려운것 같네요ㅋ 다만, 오늘날에 갑을 양자대결이 고착화되어서 문제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상황에 따라서 을이 병에게 갑질을 하고 결국 과거의 피해자가 오늘날 가해자가 되는 유동적인 악순환을 끊는게 우선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현대선진산업사회는 고객지향서비스, 권한과 역할이 제한되고 세분화되어있는 조직구조 등의 특성으로 인해 갑이 을을 내세워 병을 억압하거나 병의 불만을 억제하려는 대리전쟁이 단기간에 종식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극단적인 견해입니다만, 이익과 임금을 매개로 소비문화를 유지하는 이상, 그 소비문화로 하여금 상대적 갑인 소비자도 결국 소비하기 위해서는 을인 노동자로 치환될 수 밖에 없는 순환 구조를 끊는 새로운 사회경제모델이 나타나기 전에는 아마 대리전쟁이 없어지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제도와 관료제가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그저 갑이 병의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이상 대리전쟁의 진정한 종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시적인 구조문제가 그렇다는 거고 식상한 결론입니다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조그만 역할(공감, 소통, 배려)로도 어느 정도 개선은 가능할거라 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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