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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과 어미

박성환 / 청년칼럼 / 2015.01.06 61.74.172.87

사돈과 어미

 

더연 4기 부편집장 박성환

 

(※본 칼럼은 11월 21일에 작성되었습니다.)

 

  2011년 여름에 개봉한 영화 ‘최종병기 활’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배경이다. 특이한 점은 시대 고증을 철저히 하기 위해 이 영화에 당시 만주족이 구사했던 ‘만주어’ 대사가 나온다는 점이다. 청나라 장수 쥬신타 역을 맡은 영화배우 류승룡과 청나라 황태자 도르곤 역을 맡은 박기웅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주, 조연 배우들이 현재, 중국 동북부 산간 오지 주민들만 쓰는 만주어 대사를 배워야만 했다. 만주어는 17세기 청나라의 공식 언어였지만, 만주족이 중원 대륙을 차지한 이후 급속히 한화(漢化)되어 지금은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인구가 원주민 20여명에 불과한 사어(死語)이다. 만주어는 오늘날의 한국어와 같은 알타이어 계통 어족으로 알타이어족 중 크게 퉁구스 어족에 속한다. 퉁구스 어족을 세분화하면 북부 퉁구스어(어원 어, 어웡키 어, 오로첸 어, 네기달 어), 남부 퉁구스 어(남동부 퉁구스 어, 남서부 퉁구스 어)로 나뉜다. 여기서 만주어는 12세기 여진어의 후손으로서 시버 어와 함께 남서부 퉁구스 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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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636년 병자호란이 배경인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김한민 감독은 당시 청나라가 썼던 만주어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한국어와 만주어는 같은 어족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어에는 만주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돈과 어미(母)이다. 이 두 언어는 만주어로 각각 ‘사둔(sadun)’, ‘에미(emi)’로 불린다. 한국어와 만주어가 상당히 유사했다는 증거이다. 이외에도 한국의 지명중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북한 함경북도 경원군 ‘아오지’는 원래 ‘불타는 산’이라는 뜻의 만주어이다. 경원군에 있는 나단산의 ‘나단(nadan)’은 만주어로 ‘7’을 뜻한다. 실제로 이 나단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한국어와 만주어의 언어적인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문법도 유사한데 만주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주어, 보어, 술어의 순서이다. 조선은 이미 청나라가 건국되기 전 오늘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야만족에 불과했던 만주족의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교육기관과 교육서를 따로 두었을 정도로 만주어에 관심을 두었다. 조선시대 통역 교육기관인 사역원에 한어(漢語,중국어), 일본어, 몽골어와 함께 정식 과목으로 만주어가 있었고, 훈민정음으로 발간한 만주어 교재인 청어 노걸대도 있었다. 17세기 청나라 건국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언어로 떠오른 만주어와 만주문자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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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만주 문자는 1632년 달해(達海)가 청(淸)나라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만든 유권점만주문자(有圈點滿洲文字)를 말한다.

 

 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 강희제가 양쯔 강 이남 한족(漢族) 군벌 세력(삼번의 난,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을 평정하고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한 17세기 말, 피지배 민이었던 다수의 한족(중국인)은 만주족의 문화를 강요받아야 했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중국인들에게 머리를 모두 밀고 끝에 머리만 길게 땋아 내리는 변발령을 내리고 의복 역시 만주족의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만주어 역시 청나라 황실과 조정의 공식 행정 언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치, 군사적으로 만주족이 한족을 완벽히 굴복시킨 그 시점부터 만주어와 만주문자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인구수로 한족의 1%도 안 되는 만주족이 인구 약 1억 명에 달하는 한족의 한가운데로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국 초기인 17세기 중반에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지방의 한인 향신층(지방의 세력가 계층)을 청 조정의 관료사회로 편입하고 행정의 편의를 위해 한어(漢語)를 어느 정도 허용했지만, 기본적으로 만주족과 한족의 거주지를 분리하여 만주 문화가 중국 문화에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그 후에 17세기 후반 강희제와 옹정제 당시에는 황제들의 노력으로 황실 종친들의 만주어 교육, 한어 교육 금지, 관직명과 지명의 만주어 표기를 지시했다. 그러나 소수의 만주족이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나라 중앙 조정의 손길이 닿지 않는 변방과 양쯔 강 이남의 강남 지방은 토착 한인 향신층에 통치권한을 상당부분 위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역들은 고스란히 한족의 영역이 되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한족과 달리, 만주족은 황실, 귀족층은 물론이고 서민층까지 한족과의 혼인으로 인해 그 혈통적 토대는 급속도로 와해되어갔으며, 한족에 대한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위해 공식문서의 만한(滿漢)병용표기를 허용하고, 이에 따라 청나라 관리들의 중국어 구사능력이 요구되었다. 무엇보다 만주족인 황족, 관리들조차 만주어를 천대하고 대신, 중국어와 한문을 배우고 쓰는 것이 자신의 지적인 수준을 뽐내는 과시 수단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줌의 흙에 불과한 만주족이 한족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송두리째 흡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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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강희제(康熙帝, 1654.5.4 ~ 1722.12.20), 청 왕조의 제 4대 황제, 정복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지만, 한인 관료를 대거 발탁하고 만주족 관료들에게 한어(중국어) 습득을 강요하여 공식 행정용어로서의 만주어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전술했듯이 현재 만주어는 현재 약 1000만 명의 만주족 중, 중국 동북부의 산간 오지에 20여명의 노인들만이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어가 되었다. 어디 이 지구상에 사라져간 언어가 비단 만주어뿐이겠는가? 우리와 밀접한 동아시아 사를 봐도 북방유목민족의 수많은 언어(돌궐어, 거란어, 서하어 등)가 사라졌다. 2009년 유네스코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의 6900여 개의 언어 중에 2500여개가 사멸위기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또한, 미국 ‘사멸위기언어연구소’의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매년 지구상의 언어가 2주에 하나씩 사라지고 있으며, 1백 년 뒤에는 세계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언어의 소멸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영고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주어와 같이 그 민족의 패권적 지위가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부에서부터 소멸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만주어의 사례에서 오늘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경제력이 15위권이고 군사, 문화, 체육 등 다방면에서 중견국으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있지만 한편으론, 자국어를 천대하고 외국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혀를 잘 굴리는지 재롱떠는 것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영어가 의사소통 수단이 아닌 계급을 결정짓는 도구가 되어버린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자국어 천시 문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는 현재 소멸되어가는 다른 소수 언어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세계적인 언어 정보 제공 사이트인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2014년 현재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 13위에 랭크되어있다(놀랍게도 프랑스어가 14위). ‘100만 명만 써도 해당 언어는 살아남는다’는 통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의 (남북한 7천만 명+재외동포 1천만)8천만 명이 쓰는 한국어가 가까운 미래에 사멸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언어의 사멸과 그 언어의 문화적 지위 향방은 별개의 문제이다. 제도적으로 만주어 교육을 장려하고 지배계급의 한어 사용을 금지하고자 했던 청나라가 자신의 언어인 만주어를 서서히 잊어버렸듯이, 그 언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수치와 통계로 나타나는 사용인구의 규모나 제도적 틀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이다. 오렌지를 ‘어륀지’라고 발음시키기 위해 어린자식에게 구강수술을 강요하고 학문의 깊이와 가치를 전달하기보다 한국인들끼리의 서투른 영어로 ‘수박 겉핥기 식 수업’이 되어 버리는 오늘날 한국 대학의 현실, 글로벌화(사실은 미국화)라는 이유로 제품의 한국식 이름을 기피하는 기업들, 한국 땅에서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 당시 패권국의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인에게 외면 받아 서서히 사멸되어간 만주어의 말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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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성환 / 부편집장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며 가슴으로 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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